'영원한 광복군' 장준하 선생 장남,
'박 대통령, 가족의 친일 행각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해야'
'영원한 광복군'으로 불리는 장준하(1918~1975,사진) 선생의 40주기를 맞아 장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66)씨가 최근 박근혜 대통령의 친동생인 박근령씨의 친일망국 발언을 '아버지 박정희에 세뇌돼 뼛속까지 친일'이라고 규정하면서 신랄하게 비난했다.
장호권씨는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부친 박정희 전대통령 등 가족의 친일 행각에 대해 국민에게 사과해야한다고 주장한 데이어,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행적 미화'엔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장호권씨는 지난 14일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진정한 광복은 외세의 영향 없이 자주독립과 통일이 이뤄져야 가능합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을 하는 정신으로 자주독립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합니다."고 주장했다.
장호권씨는 이어 "광복 70년이 지났지만 친일파 후손들이 정치·경제·사회 전반을 장악하는 등 진정한 광복을 맞지 못하고 있다"고 소회를 밝혔다.
장씨는 또한 "민족의 미래를 위해, 일제에 충성한 친일 민족반역행위자들을 분명히 정리해야 한다. 그들을 최소한 지배세력에서 몰아내고 정통성 있는 세력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씨는 "독립운동가 자손들은 70년 동안 숨죽여 지낸 반면 친일 민족반역행위자 후손들은 기득권을 누려왔다. 이들은 또다시 이완용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친동생 박근령씨의 최근 '친일 발언'과 관련해 장씨는 "혈서로 일제에 충성을 맹세한 만주 군관학교 출신의 아버지 박정희에게 세뇌되어 뼛속까지 친일임이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더 이상 침묵하지 말고 가족의 친일 행각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홍영표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은 '나의 조상은 친일파였다'고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또 우장춘 박사(1898~1959)는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가담한 부친 우범선의 죄과를 씻기 위해 좋은 자리도 마다하고 평생 농업 연구에 몰두해 국민이 굶주림에서 벗어나도록 하는 업적을 남겼다.
가족의 망언에 대해 사과조차 못하면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고 덧붙였다. 박근령씨는 최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천황폐하'라는 칭호를 거듭 사용하며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문제 삼는 것은 내정간섭이다', '일본에 위안부 문제 사과를 자꾸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논란을 빚고 있다.
2007년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출마를 반대했다는 그는 "박근혜 자체가 밉다기보다는 아버지의 친일 반민족행위와 군사독재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우장춘 박사가 걸었던 삶처럼 국가와 국민에게 봉사하며 조용히 살기를 바랐다. 결국 우려했던 대로 친일·독재세력이 부활해 대한민국 역사를 후퇴시켰다"고 말했다.
김무성 대표 부친 행적 미화에도 일격가해
그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부친 행적 미화 논란에 대해서도 "일본에 충성한 사람을 독립군이나 애국지사인양 탈바꿈시키려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라며 "홍 의원처럼은 못하더라도 친일파 후손으로서 그동안 누려온 기득권에 대해서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을 돌며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초청강연을 해온 장씨는 "민족 정통성이 없는 친일세력들이 나라를 관리하면서 범죄사실을 숨기기 위해 진실과 역사를 왜곡시켜왔다. 왜곡된 역사를 배운 젊은 세대들로부터 '독립운동을 왜 했냐'는 얘기가 나오고, 심지어 '일본이 지배하지 않았으면 근대화가 어려웠을 것'이란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며 역사 바로 알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장준하 선생은 누구인가 ?
고(故) 장준하(1918∼1975)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정치가로서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일본동학대학 철학과, 동경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장준하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약혼녀의 정신대 차출을 막고 가족의 일제로부터의 탄압을 대신하기 위해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1944년 1월에 자원 입대한 후 6 개월만에 탈출, 일본군의 눈을 피해 6,000 여km를 걸어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중국군 중앙군 준위가 되었다.
1945년 쓰촨 성의 한국 광복군을 찾아가 1945년 2월부터 한국 광복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광복군으로 재직 중 미국 CIA의 전신인 OSS 활동을 하다가 1945년 11월 임정 귀국 제1진으로 귀국, 이후 김구의 비서로 있다가 이범석의 민족청년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1948년 출판사 한길사를 설립해 문화사업을 전개하며 1952년 월간 ‘사상’ 이듬해 ‘사상계’를 창간해 자유 민주 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1967년 대통령 선거 기간 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된 장 선생은 옥중에서 서울 동대문 을구에서 압도적 지지로 당선돼 제7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 민주통일당 창당에 참여, 민주회복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고 범민주세력의 통합에 힘쓰는 등 박정희 정권에 맞섰으며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다 1974년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이듬해인 1975년 8월17일 경기 포천군 소재 약사봉 인근에서 의문사했다.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못했다가 2011년 8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장준하 선생 묘소 옹벽이 폭우로 무너져 이장을 진행하던 중 두개골의 함몰 골절이 발견되자 2013년 정밀감식을 진행한 법의학 전문가 이정빈 서울대 명예교수는 “추락사라고 보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다”며 “머리 부분에 가격을 당해 숨진 뒤, 추락해 엉덩이 뼈가 골절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해 논란은 계속됐다.
장 선생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2013년 12월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정의화 국회의장 등 여야 의원 104명이 '장준하 의문사 등 진실규명과 정의실현을 위한 과거사청산 특별법안'(장준하특별법)을 공동 발의했으나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외면으로 법안은 아직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유로저널 김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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