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4 남북 합의 그 이후,'잃어버린 남북관계'회복되어야
'숯불 지핀 화로를 품에 안은 형상.' 우리의 안보 지형을 딱 한마디로 평가하면 그렇다.
한 발 잘못 디디면 뜨거운 숯불에 온 몸을 데일 수 있다. 화로를 내려놓으면 좋으련만 북한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안정은 그들의 적이다. 불안감과 위기 조성만이 유일한 출구다.
지난 4일 오전, 서부전선 비무장지대 통문에서 목함지뢰가 폭발했다. 곧바로 대북 확성기 방송이 재개되고, 20일 오후에는 북한의 포탄 발사와 우리 군의 대응 사격이 있었다. 이어 북한의 확성기 방송 중단 요구와 48시간 내 군사행동 감행 발표, 준전시 상태 선포가 이뤄졌다. 시한을 눈앞에 둔 22일 오후 3시, 돌연 대화 소식이 전해졌다. 남북 고위급 접촉이 이뤄졌고, 사흘간의 마라톤 협상이 진행됐다. 그러는 중에 또 북한군 잠수함 부대의 이동이 감지되기도 했다.
화전 양면의 강온전략이라지만 정도가 지나치다. 개인으로 치면 전형적인 조울증 증세다. 희비가 극단적으로 교차하니 울다가 웃다가를 반복한다. 웃고 있지만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면…. 기대는 실망에 이르는 첩경이다. 북한의 조울증은 내부 풍경의 반영이라 봐야 한다. 사정이 상당히 다급하다, 그런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서 판문점 ‘무박 4일’ 43시간 가까이 마라톤협상을 벌인 남북 고위급 대표단이 25일 ‘공동보도문’에 전격 합의했다. 그 주요 내용은 △당국회담의 조속한 개최를 비롯한 각 분야에서 대화와 협상 진행 △지뢰 폭발로 부상을 당한 남측 군인에 대한 북한의 유감 표명 △남측의 대북확성기 방송 중단 △북측의 준전시 상태 해제 △추석 이산가족 상봉 및 이를 위한 적십자 실무접촉 9월 초 개최 △다양한 민간 교류 활성화 등이다.
정부에서는 북한의 유감 표명을 이끌어냈다며 이 상황이 아주 만족스러운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합의는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북한으로부터 무력 도발에 대한 사과, 재발방지를 약속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24일 현재 진행 중인 고위급 접촉과 관련, “이번 회담의 성격은 무엇보다 현 사태를 야기한 북한의 지뢰도발을 비롯한 도발행위에 대한 사과와 재발방지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라며 “매번 반복돼온 도발과 불안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북한의) 확실한 사과와 재발방지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하나는 대북 5·24조치의 실질적인 무력화이다. 5.24조치는 북한이 천안함 폭침에 대해 ‘사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 대북심리전(확성기, 전광판, 전단 등)을 재개하기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특별한 반응없이 이번 합의로 유야무야하는 것은 정부의 과거 조치와는 사뭇 딴판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합의를 긍정적으로 볼 여지는 있다. 현 사태의 수습뿐만 아니라 악화일로를 걸어온 남북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오랜 기간 가뭄에 시달려온 남북관계에 일시적 단비로 끝날지, 아니면 해갈을 가져올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번 접촉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로, 또 북측의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로 최초로 이루어진 진지하고 생산적인 대화였다. 앞으로 남북은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당국간 회담을 열어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문제들을 계속 협의하기로 했다. 이제 한 달 가량 남은 추석이 이산가족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계기로 되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실천이다.
위기에서 교훈을 찾고 신뢰를 쌓아나간다면 지금부터 몇년이 2000년대에 크게 열렸던 민족화해의 시기를 넘어서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시작된 남북관계의 ‘잃어버린 시간’은 이제 끝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