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새로운 선택, 벤이즘(Bennism)을 넘어서 코빈이즘(Corbynism)이 성공할 수 있을까?
노동당 새 당수 등장으로 현 영국 정계와 여론이 심각한 논쟁과 파란을 일으키고 있다. 현 수상 데이비드 카메런은 제러미 코빈(Jeremy Corbyn)이 노동당의 리더로 당선된 것은, ‘국가의 중대한 안전 보장과 경제안정을 위협하고 우리의 가정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처음 그가 당수 후보자로 등장했을 때는 은근히 그가 당선되면 차기 정부를 계승하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부추겼던 보수당이 태도를 바꾸어 국가안전보장에 심각한 위협을 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노동당의 새 당수 제러미 코빈에 대해서 우려하고 있는 것은 보수당뿐만아니라 노동당의 많은 현역의원들도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토니 블레어의 측근은 그를 지지하는 노동당원들을 ‘무뇌아’라고 비난했다. 전수상 토니 블레어는 당집회에 나타나( 제러미 코빈의 지원에 대해서 직접 경고하고 세 번이나 당원들에게 그에 대한 지원을 철회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소위 신노동당(New Labour)을 주창한 블레어의 지지를 받으며 스스로 토니 블레어의 후계자를 자처하던 리즈 켄달은 득표 4%에 머물러 참담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 외 두 후보자가 각각 19%와 17% 득표에 그쳤다. 처음 제러미 코빈 후보자에게 냉소적인 시각을 보내던 보수당이 갑자기 그의 당선에 대해 위협성을 느끼게 된 까닭도 이같은 선거결과에 기인한 것이다. 거의 60%에 달하는 절대적 지지와 성원을 받고 당선되고, 또 그를 지지한 20여 만명의 지지자는 일반 투표자가 아닌 적극적인 정치참여자로 각종 시위및 영국의 주요 켐페인을 주도한 위협적인 진보주의자 그룹이기 때문이다. 제러미 코빈을 이해하고 알기 위해선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토니 벤(Tony Benn)의 벤이즘(Bennism)이다. 벤이즘은 마아가렛 대처 정부 이전 노동당 정부에 이념을 제공하고 이끌던 실질적 기수이자 지도자로 실천적 사회주의자이자 운동가였던 토니 벤의 이념이다. 영국에서 유일하게 대처리즘과 함께 벤이즘은 현재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중요한 정치적 이념이다. 현재 보수당 수상인 데이비드 카메론도 ‘대처리즘’의 신봉자다. 대처리즘은 토니 벤의 노동자 들을 위한 사회복지 정책에 반대해 나온 국가주의적 정책이었다. <토니 벤과 새 노동당 당수 제러미 코빈> 코빈은 벤이즘을 추종하고 그가 당권의 뒷전으로 밀려 노동당 그늘에 있을 때도 토니 벤의 주변을 항상 머무르며 따랐다. 토니 블레어가 이 벤이즘을 버리고 중도적 노선을 선택하며 ‘신노동당’과 ‘제 3의 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번 노동당 당수 선거에서 토니 블레의 노선을 지지하던 후보가 4%를 겨우 받은 것은 바로 제 3의 길을 선택한 신노동당의 몰락을 의미한다. 코빈은 신노동당 중심으로 당권을 장악한 현 노동당의 중심세력과 피할 수없는 갈등과 반목을 극복해야하는 현실에 직면한 것이 현실이기에 그는 결국 싶패하고 말 것이라는 부정적 시각에 노출된 것이다. <평생 사회운동가로 영국의 보수주의 정책에 대항했던 제러미 코빈>
이렇게 그가 당면한 내부의 적 뿐만아니라 영국의 미디어나 정치전문가 들도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그의 당선에 대해서 부정적 시각을 던지고 있다. 일부는 ‘결국 집권도 하지 못하고 노동당 단합에도 실패할 것’이라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가 당선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에 필자는 십 여명의 다양한 직종과 연령의 영국인들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고 여론을 수집해 보았다. 매일 심각하게 언론과 방송에 보도를 하고 있음에도 이들 중 제러미 코빈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필자가 인터뷰한 영국인 들은 그는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 중 이 원인에 대해서 비교적 논리정연하게 답변한 한 영국인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결국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시스템을 움직이는 사람 들은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가 21세기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무뇌아가 아닌가? 그가 할 수있는 일이란 결국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의 말처럼 영국 사회는 사실상 정부 수상이나 정당이 움직이는 사회가 아니다. 국왕을 중심으로한 로열리스트가 중심으로 구성되고 그 중심을 구심점으로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움직이는 사회가 영국사회이고 이것이 그들의 시스템인 것이다. 물론 보수당은 로열리스트 들의 당으로 국왕체제와 전통적구조를 지키기 위한 당이었다. 노동당과 자유당이 보수당을 견제하고 각각 노동자와 진보주의자를 위한 정치를 표명하며 등장했지만 이들은 전통적 영국사회를 견제하는 데고 실패했다. 20세기 이후 26명의 수상 중 단 9명 만이 이 두 정당의 수상이었지만 토니 블레어는 지난 97년, 거의 백여년 간 지속되었던 노동자를 위한 사회주의적 정당정책을 포기하고 대처리즘과 벤이즘 사이의 중간인 제 3의 길을 주장하며 ‘신노동당’을 선언했다. 1997년부터 2010년까지 토니 블레어의 집권과 브라운의 그늘 아래 32 년간 의회의 뒷 좌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8선의원인 제러미 코빈이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당선된 까닭이 바로 ‘제 3의 길’, ‘신노동당’에 대한 염증과 실망으로 나타난 반작용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이 원인이 전부가 아니다. 제러미 코빈은 평생 동안을 검소한 노동자처럼 자전거를 타고 변화없이 한 길을 걸어온 정직한 정치가이자 실천적 사회 운동가로 수 십년 동안 전쟁반대 등 사회변혁과 개선을 위한 데모와 시위에 직접 참여하며 수 십만의 행동적 실천가들의 지지가 그의 원초적 힘이다. 이것이 이번 당수 당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것을 목격한 영국의 보수주의자 들과 로열리스트 들은 우려 이상의 위협을 느끼고 있음이 확실하다. 코빈을 위시한 진보주의자 들의 행보에 대해서 보수당과 로열리스트들은 우려 이상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국가안보와 경제안정, 그리고 심지어는 모두의 가정안전까지도 위협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국가안보와 경제안정, 그리고 최우선으로 보호 받아야할 국민의 가정까지 위협한다면 그것은 결코 반대당의 당수가 될 수없는 것은 물론 테러리스트나 적대국의 침략군일 뿐이다. 즉 카메론과 보수주의자들은 단순한 비방이나 경고 수준이 아니라 심각한 적으로 새 노동당 당수를 규정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한국의 드라마보다도 한국 선수가 뛰는 축구시합보다도 요즘 시시각각 전쟁터처럼 긴장을 연출하는 영국정치 현장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한국인의 시각에선 이 먼나라의 비디오 게임같은 비현실적 정치현장을 몇 개의 화두를 가지고 지켜 볼 필요가 있다. 첫째 제러미 코빈을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Idealist)라고 지칭하는 것이 타당한가? 둘째 그는 보수주의자들이 우려하는 만큼의 위협적인 정치인이 될 수있을까? 셋째 그는 지금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진보주의 자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첫째는 제러미 코빈을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Idealist)라고 지칭하는 것이 타당한가?에 대한 우문은 ‘과연 정치란 누구를 위한 것인가?’하는 것과 현실과 이상이란 무엇인가? 한국인은 아직도 정치가 사회를 바꿀 수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영국인 들은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관습으로 굳어진 사회체계 시스템이고 정치가가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이상주의자의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눈에는 코빈은 꿈꾸는 이상주의자인 것이다
결국 그가 꿈꾸는 서민을 위한 사회주의 정치는 정말로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 들의 판타지인가에 대한 구체적 답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누구나 평등해야 된다고 주장하고 중요한 철도산업과 전기, 수도 등 에너지 산업은 국유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원자력 잠수함이나 핵전력은 국가가 가져선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반해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주의자들은 능력대로 사는 것이 평등이며 일하는 만큼 노력하는 만큼 받는 것이 당연하며 사회주의적 복지정책을 반대한다. 둘째 그는 지금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이 걱정하는 만큼 위협적인 정치인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은 제러미 코빈이 노동당을 평정하고 단합시키며 차기 정권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우려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가진 문제는 산적해 있다. 미국도 그의 당선을 반대할 것이고 특히 이스라엘 정부에선 반대를 넘어서 공적으로 제거의 대상, 심각한 적이 될 수도 있다. 그는 팔레스타인 권리와 자유에 대해서 적극적 캠페인을 벌려 반유대주의자로 찍혀 있디. 즉 미국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선 그동안 어떤 정책과 전쟁도 서슴치 않고 자행한 국가 들이기에 더욱 그의 행보를 마치 범죄집단에 쫓기며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한 우둔한 시민을 마치 드라마 속의 주인공처럼 아슬아슬하게 지켜보며 즐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 일부의 예견처럼 위협적인 정치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그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아무튼 제러미 코빈은 영국뿐만 아니라 세계 진보주의적 지식인과 운동가에게 새로운 희망임이 틀림없다. 그가 무엇을 할 수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가 중간에 어떤 그 시련으로 좌절을 한다면 그는 더욱 수많은 제러미 코빈을 다시 나오게 할 것이 틀림없다. BBC는 중도적 언론에서 벗어나 그는 32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과거의 사진과 행보를 보도하며 우려적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데이비드 카메론이나 보수당들과 로열리스트들은 한 세대전인 30여 년전이 아니라 아직도 빅토리아 시대의 대영제국에 여전히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로 구태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영국의 현실이다. 실재로 시대적 변화에 적응을 못하는 것은 코빈이 아니라 보수당의 고질적 문제인 것이다. 아무튼 제러미 코빈과 그의 정책 담당자들은 그가 이제까지 종속되어 있던 벤이즘을 반드시 수정하고 개선해야 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기존 사회주의 문제점을 타개한 새로운 타협점을 찾아 개인의 욕망이 극대화된 탈구조주의사회의 대안이 될 수있는 그 만의 독창적인 코빈이즘(Corbynism)을 구축하기를 빌 뿐이다. 20세기의 자본주의는 분명 실패했다. 신자유주의는 물론 그 대안이 되질 못하고 있다는 답변도 우린 지난 십 수년 간 미국의 경제 실패로 확연히 깨달았다. 그러나 문제는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제러미 코빈이 새로운 사회주의 정책으로 살아남기를 기대하는 진보주의자의 꿈, 새로운 코빈이즘이 나와 세계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기를 바라는 기대는 정말 아이디얼리스트의 판타지로 만 남을 것인가? 코빈의 성공 혹은 실패는 한국정치의 변화에 대한 전망을 가능하게 해 줄 뿐만아니라 21세기를 예견할 수있는 사례로 흥미있게 지켜볼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