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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5.09.30 19:37
색계 : 사랑에 대하여
조회 수 3268 추천 수 0 댓글 0
사랑에 대하여 색, 계(色, 戒 , Lust, Caution), 2007년작 이안 감독
이안 감독의 2007년작 영화 ‘색, 계’를 보았다. 2007년작으로 오래된 작품이지만 ‘이 영화의 정사신이 실제였느냐’는 논란이 8년이 지난 최근 불거지는 것을 보며 이안 감독이 이 영화와 정사신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2007년 영화 상영 당시 중국 당국의 검열, 탕웨이의 중국 TV 출연 정지처분 등으로 기자는 영화가 이념과 외설 논란에 휩싸인 어렵고 지루한 영화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영화를 보니 생각보다 재미 있고 마음에 와 닿았다.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중국 상해. 왕치아즈는 영국에 간 아버지가 자신을 데려가지 못하는 상황이 야속하지만 아버지 말대로 일단 홍콩으로 건너간다. 친구와 학교 생활에 적응해 가던 중 중일 전쟁에 참전한 형의 죽음으로 항일 의식을 갖게 된 광위민을 만나 애국 연극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는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재혼 소식에 힘겨운 그녀는 혼신의 눈물 연기를 선보여 관객들의 큰 감동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녀는 더 극적인 연기를 요청받게 된다.
광위민은 고향 사람 조덕희를 우연히 만나 친일 인사 ‘이’가 홍콩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왕정위 친일 남경 괴뢰정부의 주요 인물로 항일 활동을 하는 요원들을 잡아 고문, 살해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광위민은 연극단 친구들에게 방학 기간을 이용해 ‘이’에게 접근해 그를 암살하자고 제안하고 왕치아즈와 친구들은 모두 함께하기로 결의한다.
학생들의 어설픈 작전은 왕치아즈의 순발력으로 빛을 보는 듯했다. 왕치아즈는 ‘이’의 부인과 친해지고 그 집을 드나들다 급기야 ‘이’가 왕치아즈에게 이끌려 집 앞까지 찾아온 것이다. 본격적으로 ‘이’를 유혹하기 위해 성경험이 없던 왕치아즈는 친구 중 하나와 성관계까지 갖는 준비를 하지만 ‘이’ 부부가 급하게 상해로 떠나게 된 탓에 작전은 무산된다.
3년이 흐르고 왕치아즈는 다시 상해로 돌아와 오랜 전쟁, 자신을 부르지 않는 아버지와 친척의 횡포로 피폐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녀 앞에 광위민이 다시 나타난다. 왕정위 정부에 대항해 암살 작전을 펼치고 있는 중경정부가 그녀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더 체계적인 훈련과 지원을 받고 다시 ‘이’에게 접근하는데 성공한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왕치아즈가 ‘이’의 암살 작전에 가담하게 되는 과정은 왕치아즈 본인의 항일 의식보다는 친구들과 함께하려는 감정적인 결정에 의한 것이었다. 여기서 자기 파괴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왕치아즈가 다시 중경 정부의 암살 작전에 가담하는 것 역시 체계적인 의사결정에 의한 것이 아닌 피폐한 자신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바램에 의한 것이다. (중경 정부는 작전에 성공하면 그녀를 영국에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왕치아즈는 우정, 새로운 삶에 대한 동경으로 생명을 담보로 한 작전에 뛰어드는 색(色)-욕망, 계(戒)-경계, 계략의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은 인물이다.
‘이’는 어떤가? ‘이’는 중경 정부가 왕치아즈에 앞서 보낸 여성 2명을 발각해서 살해할 만큼 ‘계’에충실한 사람이다. 왕치아즈가 호소하는 것처럼 ‘이’는 육체적인 관계 안에서도 그녀의 감정이 진짜인지 확인할 때까지 그녀의 몸과 마음에 파고든다. ‘이’가 이처럼 색과 계가 일치된 사람인 것을 보여주는 정사신들은 충격적이다. 이 장면들은 점점 ‘이’에게 빠져드는 왕치아즈의 변화 등 두 사람의 심리 또한 잘 보여준다. 원작 소설에서는 성관계에 대한 묘사가 많지 않은데 소설의 심리 묘사를 이안 감독은 이미지로 전달한 것이다.
이러한 정사신들에 대해서 뉴욕타임즈 등도 당시 ‘실제 섹스신이 아니냐?’는 보도를 낼 정도였다. 이에 이안 감독은 “영화를 봤느냐? 봤다면 본 그대로다” 라는 말을 해 논란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실연은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육체적 관계가 거듭될 수록 이들이 서로를 대하는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운전 기사가 있는 차 안에서 왕치아즈에게 폭언을 하며 그녀의 몸을 마구 더듬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그가 왕치아즈를 일본 요정으로 불러내는 장면이 있다. 일본 장교들이 술에 취해 흥청 망청대는 속에 부상을 입고 홀로 울고 있는 일본 장교에게 그녀의 눈이 향한다. 이제 전세가 기울어 패망이 예상되는 상황에 놓인 일본군 장교들과 그들과 술을 마시고 운명을 함께하는 ‘이’. 자신의 내면에 ‘이’는 왕치아즈를 초대한 것이었다. 왕치아즈는 ‘낭군이여 영원히 함께하자’는 내용의 노래를 이에게 불러준다. 이 때 ‘이’는 꺼내 들었던 담배를 차마 피지 못하고 왕치아즈의 노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날 밤 왕치아즈를 데려다 주면서 ‘이’는 할 말이 있다며 운전 기사를 차 밖으로 내보낸다. 그리고 왕치아즈에게 부탁이 있는데 자기 대신 누군가를 찾아가 달라고 그리고 이 일을 두 사람만의 비밀로 하자고 말한다. 그 누군가는 보석상으로 ‘이’가 왕치아즈를 위해 반지를 주문해 둔 것이다. ‘이’가 육체만이 아닌 마음으로도 왕치아즈를 사랑하고 배려한다는 것이 잘 드러난 장면이었다.
서로에 대한 계략, 탐색으로 시작된 만남이 육체적 관계로 이어지고 그것이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고 소중한 것을 내어주는 관계로 발전되어 가는 모습. 이것이 감정, 욕망, 이익, 시대적 상황이라는 한계에 둘러 싸인 인간 군상들의 사랑이라고 이안 감독은 말하고 있다.
영화는 이미지로 만들어진 세계인지라 영화를 보고 나면 그 이미지에 갇히는 것같다. 여러 논란이 많았던 색계인데 보고 나니 왕치아즈를 바래다 주며 차 속에서 그녀를 바라보면 다정한 ‘이’의 모습이 많이 기억난다. 왕치아즈처럼 색과 계의 경계선이 불분명한 우리들도 친구 때문에 정 때문에 괜한 행동, 사고를 많이 치며 살아간다. 이 가을, 우리의 ‘계’를 파괴하고 피해를 줬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소중한 친구, 가족들을 다시 품는 마음을 가져보면 어떨까. 사랑이 모두를 변화시킬 것이니 말이다.
프랑스 유로저널 석부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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