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의 난민, 국익과 직결된다.
시리아가 2011년 내전에 휩싸이고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가 넓은 지역을 점령하는 지경에 이르자 엄청난 수의 주민이 시리아 밖으로 탈출하는 사태가 상당 기간 지속되고 있다.
시리아 주변 국가들은 물론이고 서유럽, 동유럽 국가들로 가려는 시리아 난민의 비참한 상황이 하루도 빠짐없이 세계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멀고도 먼 한국에까지 700명 이상의 시리아인이 난민 신청을 했다 하니 그 참상은 추측하기도 어렵다.
사실상 난민은 전쟁이 끊이지 않고 국가 간 정치적·경제적 격차가 큰 오늘의 세계에서 숙명과도 같은 존재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난민 문제가 국제 관심으로 부상하기 이전부터 난민은 국제사회의 숙제였다. 1921년 유엔은 난민고등판무관을 처음으로 임명해 난민 문제에 대응하기 시작했으며, 1951년 난민협약(난민의 지위에 관한 협약)을 채택했다.
난민은 정치적·종교적·사회적 박해를 피해 탈출하는 사람이라고 난민협약은 정의한다. 한국은 1994년에야 난민협약에 가
입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면모를 갖춘 후 정치·경제 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성취한 나라답게 아시아 최초로 2012년 난민법을 제정해 2013년부터 시행하게 됐다.
그렇다고 한국이 난민 수용과 처우에 모범적인 나라는 아니다.
지금까지 국내 난민인정률은 5% 정도로, 전 세계 난민인정률이 30%가 넘는 것에 비해 어처구니없이 낮은 수치다. 일본보다 난민인정비율이 높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일이 아니다. 난민에 대한 처우도 그리 좋지 않은 편이고 사회적 차별도 심하다.
왜 그럴까. 전 세계에서 인종적으로 가장 동질적인 나라가 한국과 일본이다.
아마도 외국인 공포증이 가장 심한 곳도 한국과 일본일 것이다. 두 나라에서 모두 같은 ‘민족’에 대해서만 배타적 포용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일본에서 엄격한 외국인 노동자 정책이 중남미의 일본인 이민자에게는 유화적이어서 일찌감치 이
들을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돌봄노동 영역에 조선족 여성만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더욱이 한국은 탈북자를 조건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는 별개의 나라이지만 우리 헌법에서는 한반도 전체가 한국 영토이니, 이들은 우리 국민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문제는 법으로 규제하기 힘든 사회적 차별이 다양한 형태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초저출산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빠져 있다. 이로 인한 인구 감소의 위기가 곧 닥쳐올 것이다. ‘헬조선’이라는,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신조어가 의미하듯 비관적이고 자조적인 사회 분위기가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게 한
다. 그런데 이것이 폐쇄적인 외국인 혐오의 토양이 되고 있는 것은 무슨 아이러니인가.
이제 헬조선을 ‘천국 한국’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개방적인 태도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차별부터 시정하자. 우리 민족이어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품어줄 때 놀라운 창의력을 발휘할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좀 더 관용적인 정책이나 처우가 절실하다. 그들은 우리의 생산을 담당하는 인력이다.
난민, 그들은 세계적인 전쟁과 불평등의 희생자들이다. 큰 시야로 볼 때 동질적이고 폐쇄적인 우리 사회가 국제화의 훈련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사람들이고, 우리 사회가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제공하면 중요한 생산적·문화적 인재가 될 수 있다.
누구나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나라의 이미지를 벗어나, 한국을 국제적인 나라로 만들어야만 우리의 미래가 밝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폐쇄적 일본과 개방적 미국·독일을 비교하면 금방 두 갈래 길 너머가 보이지 않는가.
외국인에 대한 수용과 관용은 인권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국익과도 직결되는 것이다.
난민을 받는 것에 물론 신중을 거듭해야만 하지만, 그 과정은 국가도 시민도 기본적인 관점을 전환해야만 하는 시험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