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광으로서 예상치 않은 좋은 작품을 발견했을 때의 그 쾌감이란 말로 다하기 어렵다. 우연한 계기로 ‘구타 유발자들’이라는 괴상한 제목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중간첩’ 이후 한참 공백기를 갖다가 복귀 후 예전만한 힘을 못쓰고 있는 한석규와 이문식, 오달수 같은 맛깔 나는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한 작품, 그리고 흥행에서 거의 참패한 작품이라는 것 외에는 이 영화에 대해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었다.
제목이 워낙 특이해서 앞부분만 잠깐 보려던 것이 그만 보다가 푹 빠져버렸고, 보는 내내 묘한 긴장과 웃음, 그리고 이렇게 개성 강하고 훌륭한 작품을, 그것도 우리 영화에서, 이제서나마 발견했다는 사실이 몹시 뿌듯했다.
영화는 인적이 드문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과 마주치면서 벌어지는 소동을 보여주고 있다. 카사노바 기질을 지닌 성악교수 영선은 응큼한(?) 의도를 지니고 여제자 인정을 자신의 벤츠에 태워서 교외로 드라이브를 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통경찰 문재에게 신호위반으로 단속에 걸린다. 어쨌든, 인적이 없는 강변에 차를 세우고 있는 중, 본심을 드러낸 영선으로부터 인정은 도망친다. 그러다가 모래 웅덩이에 영선의 벤츠가 빠져서 움직일 수 없는데, 강변에 세 명의 기괴한 마을 청년들이 모여든다. 이들에게 붙잡혀 두려움에 떠는 영선, 한편 도망친 인정은 터미널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나선 마을 청년 봉연을 만나지만, 그는 인정을 강변으로 데려온다. 알고 보니 기괴한 마을 청년들의 우두머리 격. 여기에 교통경찰 문재의 남동생 시후가 이들 청년들에게 폭행을 당하고, 후에 밝혀지는 문재와 봉연의 과거… 꼬여만 가는 이 상황은 과연 어떤 결말로 치달을 것인가?
이 영화는 어찌 보면 한 편의 연극 같은 상황 설정을 갖고 있다. 한정된 공간에서 한정된 등장인물들, 그러나 그 인물들은 얽히고 설킨 갈등관계를 빚고 있다. 게다가 강변에 나타나는 마을 청년 3인방은 일상에서 만나보기 힘든 비정상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이 빚어내는 소동은 도무지 예측 불허로, 다음에 전개될 상황에 대한 궁금증과 긴장감을 유발하고 있다.
영화는 블랙 코미디적인 유머와 풍자를 담으면서도, 긴장과 스릴,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서는 제목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일종의 메시지까지 짜임새 있게 담아내고 있다. 자칫 단조로울 수도 있는 상황 설정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치밀한 연출력과 배우들의 개성 강한 연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대체 어떤 감독이 연출을 했길래 우리 영화에서 이렇게 보기 드물게 개성 강한 작품이 나왔나 했더니, 이 영화를 연출한 원신연 감독은 얼마 전 좋은 결과를 얻었던 김윤진 주연의 ‘세븐 데이즈’를 연출한 인물이었다. ‘구타 유발자들’은 2004년 영화진흥위원회의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었으며, 바로 원신연 감독 자신의 시나리오였다.
사실, 이 영화에서 한석규는 어떻게 보면 주연이라기 보다는 조연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워낙 개성 강한 조연 배우들이 극의 전반을 이끌어가는 탓에 아쉽게도 한석규는 그다지 돋보이지는 않는다.
이문식이야 워낙 좋은 배우인 만큼, 역시 환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기괴한 마을 청년 3인방 중 오달수는 그 독특한 외모처럼 정말 기괴한 인물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으며, 여러 작품에서 조연 연기로 간간히 얼굴을 비쳤던 정경호도 앞으로 명품 조연 배우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성악교수 영선 역의 이병준은 이 작품을 보기 전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서 굉장히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역시나 ‘구타 유발자들’에서도 정말 좋은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그는 곽경택 감독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서 형사로 출연하는 한석규에게 학대 당하는 여장남성 안토니오 역을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다. 아마도 ‘구타 유발자들’에서 그를 눈여겨 본 한석규의 적극 추천에 따른 출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평범한 영화, 뻔한 상업영화에 실증난 관객이라면 ‘구타 유발자들’을 적극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