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화예술 산책
동방의 박사들 2
마태오복음서(2,16-18)에 나오는 이야기다. 베들레헴 지역에 예수와 동시대에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다 잡아 죽이도록 명령을 내린 헤롯왕의 야기다. 교회는 그 희생자들을 크리스챤 역사의 첫 번째 순교자들로 영예롭게 하지만 당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의문이다. 이 성스러운 순전한 희생자들의 축일은 12월28일이다. 빠리 시내 중앙의 레알에 가면 이들의 공동묘지(Fontaine des Innocents) 가 있다.
이 사건이 발생 당시 미리 계시를 받은 예수와 요셉과 마리아는 함께 이집트로 피난을 떠난다.
남아 있는 아이들의 대한 언급은 없었다.
니꼴라 뿌쌩(Nicolas Poussin, 1594~1665),
죄 없는 자들의 대학살(Le massacre des Innocents1625-1629) 147X171cm 샹띠이 꽁데 박물관
역사학자들이 찾아 본 당대의 기록에 따르면 헤롯왕 시대에 이와 같은 사건에 대한 기록이나 인구 감소 등의 자료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의 기록을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전제아래 신앙의 문제로 들어 가서 분석해 보아도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동방 박사들은 왜 직접 베들레헴으로 찾아 오지 못하고 예루살렘 왕궁이 있는 도시에 가서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퍼트렸을까 ?
왜 왕이 있는 곳에 가서 새로운 왕이 어디서 태어났는지를 묻고 다니며 분란을 조장하였을까 ?..
이야기를 들은 왕은 동방에서 온 박사들의 말을 듣고 왕이 태어난다면 베들레헴이라고 지적해 주고 혹시 왕을 뵙게 되면 자기에게도 알려 주어 새로 태어난 왕에게 경배하러 가겠다고 약속을 하였을까 ?….
꿈에 나타난 천사는 왜 동방의 박사들을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길로 인도하여 헤롯으로 하여금 아무 연고 없는 아이들을 모두 죽이게 하였을까 ?..
뿌셍의 작품에 표현된 성경의 기록으로 헤롯의 병사가 당시 태어난 아이를 칼로 베려고 내려 치는 동작을 보이고 있다. 칼을 들고 있는 병사를 말리는 어미는 이미 핏기를 잃었고 정신을 잃고 있다. 뒤로 아이를 안고 도망치는 여인이 있고 죽은 아이를 안고 미쳐 뛰어 가는 어미가 있다.
뿌셍의 작품은 1611년 볼로냐에서 그려진 기도 레니(Guido Reni)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뿌셍의 작품은 1937년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의 몇몇 등장 인물들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구세주가 나타난 그 시대에 아무 죄 없는 생명들의 희생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나…
헤롯왕 시절의 아이들을 학살하는 이야기는 성서 이외의 자료에서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당시 베들레헴 마을의 규모가 인구 천명 정도라고 보면 그 당시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의 숫자를 스무 명 정도로 추산해 볼 수 있다. 성서 역사학자들도 이 사건에 대하여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 사건의 역사성에 대하여 회의를 품은 자들도 있고 역사적인 가능성을 열어 놓는 이들도 있다. 이 대학살의 역사성에 대한 의문은 볼테르가 철학사전 « 죄 없는 자들 »이라는 항목에서 제기한 것이 있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헤롯의 권력 보호를 위한 의지의 한 예로 지나간 사건을 성서가 기록한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헤롯의 품성이 단 하루도 적에 대한 처벌이나 복수를 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러한 사건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다.
하지만 사건의 해석을 성서의 예언의 완성으로 보는 자들에 대한 비판은 남는다.
한 시대의 테러 사건을 하늘의 의지 라든가 미리 예정된 일의 진행으로 본다면 무고한 죽음을 정당화 시켜주는 논리가 성립된다. 가해자의 손에 하늘의 뜻이 담겨 있으며 피해자의 피에도 하늘의 뜻이 담겨 있다는 해석은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 들일 수 없는 논리다.
성서학자 중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분의 논지는 마태오의 이야기는 신학적으로 구약의 예언서들 « 호세아 »나 « 에레미야 »나 « 이집트 탈출기 » 등의 기록에서 나타난 예언의 완성으로 주제로 풀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성인도 이 학살의 장면을 기록하였다 « 엄마들은 머리를 쥐어 뜯었다. 엄마들이 자기 아이들을 감추려고 하였지만 아기들은 조용히 입 다물 줄 몰랐다. 아기들은 두려움을 배우지 않았다. 싸움은 엄마와 백정간의 싸움이다. 백정은 잔인하게 아이들을 죽인다. 엄마는 아기를 붙들고 놓지 않는다. ‘나의 아기를 너에게 넘기라니,’ ‘나의 내장 속에서 생명을 주었는데 ‘ ‘잔인하구나 죄가 있다면 내가 죄인이지 내 아들을 용서해라 나를 죽여라’
‘너희는 누구를 찾는냐 ? 한 아이를 없애기 위하여 이렇게 많은 아기를 죽여야 한다구.. 너희들이 찾는 아기는 이미 사라졌다구’ 엄마들의 비명소리는 혼란스러워지고 어린 아기들의 희생은 하늘로부터 받아 들여졌다. ‘ 아우구스투스 성인은 이 어린 순교자들이 하늘의 품에 안긴 모습에 안도한다. 하지만 아기를 잃은 엄마들은 호흡이 멈추는 날까지 평안이 찾아 들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성직자들 중에는 예수의 어린 시절과 모세의 어린 시절, 태어나면서 아이들을 죽이게 하는 사건을 결부시켜 이야기 하기도 한다. 예수를 새로이 탄생한 모세로 세상의 백성을 광야에서 낙원으로 이끌 지도자로 부각시키는 과정에서 구약의 예를 가져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카톨릭 교회에서 ‘신성한 죄 없는 자들(Les Saints Innocents)은 예수 탄생과 동시 베들레헴에서 헤롯에게 희생당한 아이들이다. 바티칸2차 공회 이전에는 하느님이 어린 아이들의 학살을 허용한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었지만 1965년 데이 베르붐(Dei Verbum)의 교리 헌법12항에는 문학적 기술에 주의를 요한다. 오늘날 학살이 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는 말은 더 이상 효력을 가질 수 없다.
교회는 2세기부터 ‘죄 없는 아이들’의 축일을 기념하였다. 혁명의 전야까지 빠리 시내 중심에 죄 없는 자들의 공동묘지가 있었다. 그곳에 분수대가 있었다. 죄 없는 자들의 분수대( La Fontaine des Innocents)는 예수의 탄생으로 희생된 어린 아기들의 영혼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 졌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면서...
태어난 생명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박애 정신을 가지고 살아 가는 것이 심각하게 위협 받아야 할 일인지..
죄 없는 생명은 없기 때문에 시대가 악해서 죄의 값을 무작위 불특정 다수가 받게 된다는 이상한 경고인지 새삼 2015년 한 해를 넘기며 생각에 잠기게 한다.
2016년에는 무고한 자들의 죽음이 더 이상 없기를 희망하면서 한 해의 붓을 꺾는다.
사계절 옥탑방에서 테오..
bonjourbib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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