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쁨에서의 절정과 아름다움의 서비스를
모두 함께 전달해 주는 것은 바로 예술이다 4
5. 우리는 삭막한 일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련다
분리파의 집(Seces-sionhaus)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분리파의 집(Seces-sionhaus)은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리히(Joseph Maria Olibrich)가 설계했다. 이것은 전통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표현을 강조하는 시세션(Secession, 빈 분리파 혹은 비엔나 분리파)의 정신을 표상하고 있다.
‘분리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secedo”를 어원으로 하는 이 명칭은 기존의 보수적인 아카데미즘이나 관 주도의 전시회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했다. 그래서 빈 분리파에 속한 작가들은 분리파의 집(Seces-sionhaus)에서 자유로운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으며, 새로운 화풍의 화가들, 소외된 작가들, 아직 알려지지 않은 화가들에게도 전시 기회가 주어졌다.
분리파의 집(Seces-sionhaus)을 거점으로 일어난 빈 분리파는 판에 박힌 사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미술과 삶의 상호 교류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적인 의미를 미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 그들은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예술들을 <신성한 봄>에 담아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클림트의 ‘빈 분리파 운동’은 현대적 삶의 새로운 방향을 찾아나서려는 혼란스러운 출구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에 영향을 미쳤던 헤르만 바르는 “우리는 삭막한 일상과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자!”고 외쳤다.
그들의 이 야심만만한 선언은 순수예술 뿐만 아니라, 도시계획, 건축, 가구, 생필품, 거리 조성 등 모든 분야에서 추구되었다. 문학 분야에는 후고 호프만슈탈이, 음악 분야에는 말러, R.슈트라우스, 후고 볼프가, 건축 분야에는 아르누보 건축가 오토 바그너가 활약했다.
미술 분야에는 관능과 장식의 대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제자들 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쉴레가 활약했다. 그들은 ‘그 시대에 맞는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슬로건 아래 새로운 예술에 매진했다.
1898년 분리주의 운동을 추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사실 당대 귀족들과 이에 결합된 중산층 이상 시민들의 숨 막힐 듯한 보수적 성향때문이었다. 하지만 분리주의 초창기 때 클림트는 요제프 황제를 초청할 정도로 제한적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그는 차츰 빈의 보수적 정서에 환멸을 느껴 더 파괴적이고 충격적인 미술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가 1894년에 오스트리아 교육 당국의 의뢰를 받아 빈 대학의 법학, 철학, 의학부를 상징하는 벽화를 제작했을 때, 당시의 주류적인 정서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그림을 그려 빈의 예술계와 사교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신성모독과 황제 모독, 그리고 점잖은 교양시민의 양식을 모독했다는 비난이 클림트에게 퍼부어졌고, 귀족들은 물론 스스로 교양층에 속한다고 생각하던 속물적인 중산층들이 앞 다투어 클림트의 벽화를 비난하고 나섰다.
비난이 쏟아지자 빈 분리파의 회장이었던 클림트는 더욱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을 바탕으로 한 작업을 공공연히 펼쳤다. 이윽고 기존의 권력 집단은 물론 일반 여론에서도 ‘지저분한 그림’ 혹은 ‘무절제한 변태 성욕자의 욕망’이라는 비난마저 쏟아졌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바깥 세상에서는 반응들이 달랐다. 클림트는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철거 논란까지 일으킨 벽화 <철학>을 금상으로 선정하였으며 조각가 로댕은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체>에 대하여 “지극히 비극적이면서도 성스러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Yearning for Happiness
Hostile Powers
This Kiss to the Whole World
베토벤 프리체(Beethoven Frieze), 구스타프 클림트, 1902
19세기말 20세기초는 흔히 ‘좋았던 시절’이란 뜻으로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불리는데 그 시대의 한복판에서 인류가 그 어느 때에도 경험하지 못했던 격렬하면서도 우아한 세계를 맘껏 펼쳤던 클림트와 빈 분리파는 새로운 세기의 초엽에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아르 누보’ 열풍에 힘입어, 그 파격적인 작업을 좀 더 지속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모네, 독일의 막스 클링거, 스코틀랜드의 찰스 매킨토시 등 혁신적인 기풍을 가진 젊은 예술가들을 빈에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그들과 함께 같은 현대 모더니즘의 씨를 뿌려 나갔다.
물론 이러한 경향은 지나치게 외형적인 장식으로 흘러가면서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마모되어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된다. 결국 클림트 역시 1905년에 빈 분리파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 개인 작업에 몰두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거역할 수 없는 유혹(타나토스), 그리고 이를 견디기 위한 불멸의 사랑(에로티시즘), 이것이 클림트의 열정이다.
물뱀1, 구스타프 클림트, 1904-1907
물뱀2, 구스타프 클림트, 1904-1907
‘세기말 비엔나’에서 칼 쇼르스케는 클림트의 열정이 담긴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히게이아’에 대해 “개인의 관능성과 고통에 대한 심리적-육체적 경험은 모든 형이상학적 혹은 사회적 토대로부터 추상화된다. 인류는 공간 속에서 길을 잃었다…히게이아 자신이 뱀의 인간동형적인 변형물이며, 뱀에게 레테(망각의 물)의 잔을 건네주어 그 원초적 액체를 마시게 한다. 그리하여 클림트는 삶과 죽음의 통합, 본능적 활력과 개인적 해체의 상호 침투를 선언한다”고 썼다.
의학 히게이아, 구스타프 클림트, 1907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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