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의 영향을 받는 일을 하다보니 수시로 일기예보를 확인한다. 라디오로 듣기도 하고 카페의 털레비전을 보기도 하지만, 실시간 소식을 보기 위해 어플리케이션을 자주 확인하는 편이다. 햇살이 따갑게 느껴지기 시작하던 어느 날, 습관처럼 켠 일기예보에는 이런 문장이 함께 적혀 있었다.
'무척 아름다운 여름의 첫 날, 매우 맑음'
맑은 하늘과 선선한 바람이 부는 파리를 떠난지 두 시간 반만에 도착한 작은 항구 마을, 옹플뢰르. 네모난 항구에 비친 뭉게구름이 공기의 흐름과 함께 천천히 흘러간다. 바람에 실려 온 약간은 짭짤한 바다내음과 시청 앞에 자리한 회전목마가 아이들을 태우고 움직이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찾아든다. 마치 인상파 화가의 평온한 일상 풍경이 담긴 그림 속에 내가 들어와 있는 기분.
클로드 모네의 수련이 저절로 떠오른다. 파리에서는 오르세, 오랑주리 그리고 마르모땅 미술관에서 모네의 작품들을 속속들이 만나볼 수 있는데, 눈 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화폭에 담긴 작품 그 차체를 만나는듯 선명한 색감이다. 평화롭고도 안온하지만 어쩐지 지나치게 고요한 느낌.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사는 소리가 저 멀리에서 들려오는 듯 하다.
옹플뢰르는 모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가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도왔던 스승, 외젠 부당의 고향이기도 하다. 항구 주변으로는 그의 그림이 프린트 된 포스터가 곳곳에 자리한 채, 인상주의 화가들이 사랑한 마을임을 뽐내고 있다. 발길 닿는대로 찾아 들어가는 골목은 저마다의 매력으로 시선을 사로잡고, 작은 화분에 담겨 색색감의 생기를 더하는 제라늄 화분이 정겨움을 더한다. 그렇게 낯선이들의 삶을 엿보는 한 여행자의 발걸음이 지나친 곳마다 호기심의 발자국이 묻어난다.
파리가 아닌 다른 도시에 오면 지역 특산물을 판매하는 가게를 천천히 둘러보는 여행습관이 생겼다. 급하게 준비한 여행이라 그곳에 대해 잘 모를 때는 더더욱 그렇다. 봉건 영주제도의 영향으로 지역색이 강하게 발달한 프랑스의 노르망디는 다양한 민족과 부족이 얽히고 섥힌 관계를 맺고 있었던 역사의 영향으로 재미있는 문화나 먹거리를 많이 찾을 수 있는 곳이다. 파리 사람들이 여름 바캉스로 가장 많이 떠나는 노르망디의 도시를 꼽자면 단연 도빌이지만, 아기자기한 아름다움과 평화로움을 동시에 간직한 옹플뢰르 역시 프랑스 신혼부부들의 인기 여행지다운 면모를 곳곳에 감추고 있다.
노르망디 지역은 비가 많이 오고 여름에도 습한 기후때문에(혹은 덕분에) 포도 재배에는 맞지 않는 환경이다. 그리하여 포도 대신, 사과를 이용한 음료가 유명하다. 사과주스로 만든 알콜농도 2.5-8%정도의 시드르는 상큼하면서도 달큰한 맛이 있어, 술을 잘 하지 못하는 이들도 가볍게 즐길 수 있다. 이 시드르를 증류해서 만든 사과 브랜디, 칼바도스는 40%의 알콜농도를 선보이며 식후에 입 안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소화를 돕는 디제스티프(digestif)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옅은 먼지가 쌓인 창고를 서성이며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꺼낸다.
중학교때 천문 동아리 활동을 했다. 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커다란 망원경으로 달이 움직이는 사진을 찍으며 산모기에 뜯기던 나의 1999년은 신비로움과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밤 하늘을 수 놓은 별자리를 찾고,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며 몰두할 거리를 찾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도,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아빠가 돌아가신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던 나는, 하늘을 보는 시간동안은 나 스스로를 조금 더 또렷하게 만들고 싶었다. 수억광년 전에 쏘아진 빛이 지금 우리의 눈에 담기듯, 내가 내는 작은 빛이 누군가에게 잔상으로 남아 오래 기억되고 싶은, 그런 마음.
혀와 코 끝에 남은 시드르의 풍미가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은 오후가 시작되었다.
언제와도 신비로운 여기, 몽생미셸.
1984년, 몽생미셸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 돌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숨겨진 이야기와 이곳에 머물렀던, 혹은 스쳐간 이들의 수많은 이야기가 쌓인 '역사'가 그만큼의 가치를 인정받고 보호받아야 한다는 보편적인 생각의 결실인 것이다.
몽생미셸은 조수간만의 차가 큰 바다 위, 바위산에 지어진 마을과 수도원이다. 그 앞으로는 바다의 소금기를 머금은 풀을 뜯어 먹고 자란 양, 프레 살레(Pré-salé)들이 자란다. 프랑스어로 '미리 간이 되었다'는 뜻인데, 미카엘 대천사, 순례자를 상징하는 조가비 뱃지와 더불어 몽생미셸의 3대 마스코트이다. 어린왕자에 나오는 양처럼 하얀 얼굴이 아니라, 까무잡잡한 얼굴색이 건강해보이는 녀석들. 이들이 먹는 풀의 영향으로, 프레 살레 양고기는 요리를 할 때 따로 소금 간을 하지 않아도 되는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달걀과 버터를 이용해 화덕에 구워낸 '뿔라르 아줌마'의 오믈렛과 더불어 몽생미셸을 대표하는 요리가 바로 이 프레 살레로 만든 양고기 요리다. 주로 꼬치나 구이 형태로 제공되는데, 냄새가 나지 않아 양고기를 평소에 즐기지 않던 사람도 아주 맛있는 식사를 즐길 수 있다.
수녀와 수도사 12명, 마을 주민 13명, 마을 안의 쌩 피에르 성당의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사제 3명. 몽생미셸을 삶의 거처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은 현재 28명이다. 바다의 이름을 한 땅, 땅의 이름을 한 바다의 경계선을 오가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치 동화 속에나 등장할 것처럼 신기하고 재미있다.
마을의 초입에는 작은 우체국이 하나 자리하고 있다. 몽생미셸이 담긴 엽서를 하나 구입해서 바다가 보이는 테라스에 자리잡는다. 옅은 안개가 모였다 흩어지는 모습에 내가 정말 땅 끝에 와 있는듯한 기분이 들고, 자유롭게 하늘 위를 노니는 갈매기들의 울음소리를 배경으로, 간단한 편지를 적어내려간다. 한 장은 얼마 후 이 엽서를 받아 보게 될 미래의 나에게, 또 한 장은 지금 이 순간을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 다음을 기약한 누군가를 향해서. 이 엽서들은 몽생미셸만의 특별한 스탬프를 담고, 가까운 미래에 받는 이의 두 손으로 전해질 것이다.
'누가 신에게 대적하랴'
멀리서 보더라도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첨탑이다. 하늘로 그 마음이 더 잘 닿고자하는 인간의 어떠한 열망을 엿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몽생미셸의 주인, 미카엘 대천사는 그 이름만으로도 아릅답다. 용의 형상을 한 악마를 물리치고 있는 용맹한 모습은 천사 군대장의 명성에 걸맞게 우아하고 또 새털처럼 가볍다. 하지만 결코 그 존재의 무게감을 내려놓지는 않는다.
프랑스어로는 '미셸(Michel)'. 가톨릭 문화권인 나라이기 때문에, 세례명이 이름인 프랑스에서는 쉽게 듣는 이름이기도 하다.
137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회랑.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하며 산책을 하듯 마음을 다스리는 곳. 단연 몽생미셸에서 가장 아름답고 인상 깊은 곳이다. 중앙의 화단은 회색빛 수도원에 생기를 불어넣는듯, 초록으로 빛난다. 이 화단은 배수 문제로 13세기에 만든 원래의 것을 철거하고 다시 만들어졌지만, 아직도 그 문제가 완전히 해결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내, 마음 속 정원이 수도사들에게는 활짝 피어났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둥과 기둥은 성인 남성의 보폭에 맞춘 간격으로 일정한 규칙에 의해 세워진다. 1은 유일신, 3은 삼위일체와 천상세계, 7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따라서 137개의 기둥을 따라 한 걸음씩 걸으며 끊임없이 생각을 하고 마음을 정리할 수 있는 '회랑'이라는 공간 자체의 이루어짐은 보이지 않는 중요함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득 고개를 들면 보게 되는 기둥 위 조각 장식에는 포도 넝쿨과 꽃이 가득하다.
언뜻, 텅 빈 공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 감춰진 이야기를 발견하다 보면, 역사에, 건축에, 종교에 평소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흥미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지금 내 눈 앞에 그 시간의 증거들이 말을 걸고 있기 때문이다. 몽생미셸의 공인 가이드들은 이야기한다. 다른 문화권에서 온 관람객들이 외관만, 마을만 보고 돌아서는 것은 이곳을 디즈니랜드처럼 보고 가는 것일 뿐이라고. 진정 시간과 비용을 투자해서 이곳까지 왔다면, 수도원을 들어가서 그 시절의 이야기를 발견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믿음'이 이룩한 신비로움, 그 피조물을 바라보며 저절로 새어나오는 경탄. 8세기 경, 그 역사가 시작 된 몽생미셸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면서도 대단한 존재인지를 동시에 느끼게 한다.
이러한 감정은, 나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애정을 샘솟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혼자이고 싶을 때도 있지만 결국 사람은 누구나 외로움을 느끼고, 그 끝에는 내가 정말 혼자일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 내재한다. 그렇기에 다른 누군가와 소통을 하고 나의 존재를 알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나누며 '행복'이 가까이 있기를 원한다. 몽생미셸이 섬이었다가 육지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내 안에 들어차있는 감정의 부스러기들이 모두 물러난 후에는 나 아닌 다른 존재와의 교류가 조금 더 수월해질지도 모른다.
멀어질 수록 그 크기는 작아지지만, 원근법을 무시하듯 또렷하게 눈과 마음에 새겨진 1300년 역사의 잔상.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한 번 찾고 싶은 곳이다. 변화했을 내 모습 앞에 그대로일 몽생미셸은 나에게 또 어떠한 감정을 일깨워줄까.
글,사진 : 유로자전거나라 박송이 가이드
출처 : 유로자전거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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