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Ukraine)
현대 우크라이나 국기는 우크라이나 대법원에 의해 1992년에 제정되었다.
노란색은 밀밭, 파란색은 하늘, 산, 계곡을 상징하며 전통적으로 우크라이나인들이 깃발에 자주 쓰던 색.
우크라이나는 북쪽으로 러시아와 마주하고 서쪽으로는 벨라루스 폴란드,
서쪽으로는 슬로바키아, 헝가리, 몰도바, 루마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남쪽은 흑해와 아조프해가 위치한다.
수도는 키에브 (Kiev)이다. (출처: UN)
최근 러시아와 EU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전을 겪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신문 기사를 장식하고 있는 우크라이나는1991년 구소련연방에서 독립하여 2015년 기준 GDP 약 901억 (출처: IMF) 의 세계 62위의 경제 규모를 지니고 있다. 구소련연방국가 중에서는 경제 규모가 가장 큰 나라이며 러시아 다음으로 유럽에서 영토가 가장 큰 나라이다. 총인구는 약4,430만 명이며 이 중78% 정도가 우크라이나인, 17% 이상이 러시아인, 그 외에는 벨라루스인, 몰도바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어로 '경계 안' 혹은 '경계 지역'이라는 뜻으로 12세기부터 러시아에서 쓰였던 단어가 그대로 국명이 되었다.
현재 우크라이나인들의 기원은 5-6세기에 정착한 슬라브인들과 9세기에 정착한 스웨덴의 바이킹들이라고 여겨지고 있는대 882년 올레그 (Oleg)라고 하는 바이킹 왕이 키에브를 섭렵하여 키예프 공국(Kievan Rus)을 세운 후부터 유럽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나라로 자리잡게 된다. 988년에는 블라드미르 1세 (980-1015)의 통치 하에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되어 현재 동방 정교회가 우크라이나의 주된 종교이다.
키예프 공국을 세운 올레그 왕 (Oleg Veshchy: 879-912재위)
(출처: http://debello.ca/ussr/0862/012.html)
11-12세기 칭기스칸의 손자인 바투 (Batu)가 이끄는 몽골의 침략으로 키예프 공국은 분열되고 우크라이나의 동쪽과 남쪽은 몽골과 터키의 타타르 세력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14세기에 북쪽과 서쪽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지배를 받는다. 이들은 점차 몽골과 타타르족을 몰아냈지만 크림반도는 여전히 타타르족이 차지하고 15세기부터 오스만 터키제국의 보호국이 된다. 17세기 말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가, 동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지배하게 되고 1772-1795년에 폴란드의 형국이 기울어지면서 대부분 서부 우크라이나도 러시아의 지배로 넘어간다. 1783년 러시아는 오스만 터키가 장악하던 크림반도(Crimea)를 차지하게 되고 러시아의 주민들을 크림반도로 이주시킨다. 크림반도는 1954년 우크라이나 출신인 소련 정치가 니키타 흐루쇼프의 집권기에 소련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우크라이나에 소속되게 되는데 2014년 3월 주민투표에서 친러성향의 반도 주민들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2015년 러시아와 합병된 상태이다. 그러나 서부 우크라이나, 미국, EU 등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제사회는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을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다.
중간의 붉은 곳이 크림 반도이다. 지도의 나머지 붉은 지역들은 러시아 주변국들 가운데 영토권을 놓고 분쟁 중인 지역
(출처: Washington Post, 2014)
19세기에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러시아의 지배하에 놓여졌으나 19세기 중반 무렵에 우크라이나 내에 민족주의가 확산되고 1918년에 러시아의 적백내전이 일어나면서 일시적으로 독립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적(赤)군 볼셰비키가 내전에 승리한 후 1921년 우크라이나는 소련에 강제합병된다. 스탈린이 사회주의 집단화 정책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의 모든 경작지를 국가소유로 하고 농부들을 집단농장의 노동자로서 일하게 하는 정책을 실시하자 농부들은 자신들 소유의 가축까지 도살해가며 이를 격렬하게 반대한다. 결국 소련 정부는 우크라이나의 자영농들을 대거 탄압하였고 이로 인해 곡물 생산량이 대규모로 감소되었다. 더욱이 스탈린은 각 집당농장에 높은 목표 생산량을 할당하고 농부들이 목표량을 채우지 못하면 생산물을 가져가지 못하는 법을 제정한다.
생산성이 현저히 떨어진 집단농장들은 목표량을 채울 수 없었고 소련 정부는 우크라이나에서 발생되는 모든 곡식물을 전부 가져가1932-33년에 우크라이나 전역이 큰 기근에 처하게 되었는데 이 것이 수백 만 명의 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악명 높은 우크라이나 대기근 (1932-33년)이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행정수도였던 하르키우에는 거리에 굶어죽은 시체들이 시내 곳곳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하며 이 때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수는 최소 2백만 명에서 7백만 명 사이로 전해진다. 스탈린이 고의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발생시켜 많은 이들을 아사시켰는지 사회주의 정책의 실패로 간주해야 할지는 아직도 논의 중이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이 사건을 홀로도모르 (Holodomor: '기아로 인한 말살')로 규정하며 오늘날까지 특히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의 반(反) 러시아 성향과 강한 민족주의의 주된 동기가 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농촌지방이 파괴되면서 전통적으로 농경문화인 우크라이나를 지탱해오던 순수 우크라이나인들이 대거 사라진 이후1937-39경에 스탈린은 소련연방을 굳건히 한다는 명목으로 당시 우크라이나를 이끌고 있던 공산당원 장관들 및 당원들 약 17만 명을 사형에 처하거나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낸다. 이러한 러시아의 공포정책으로 인해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독일과 러시아의 전쟁 당시 독일에 협력하기도 했으나1941년 나치 독일은 유태인들과 함께 수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을 대량학살한다. 이 후 1943년 독일이 패하자 소련은 1943년에 키에브를 다시 점령하고 이 때 독일에 동조했다고 의심되어지는 이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이루어져 1940년 약 90만 명이었던 우크라이나의 인구는 1945년경에 약 19만 명으로 크게 감소된다.
미국신문에 실린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관한 기사
이러한 수난의 역사를 지닌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또 한 번의 가슴 아픈 사건이 바로 20세기 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라고 불려지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Chernobyl disaster)이다. 1986년 폭발 사고 발생 당시 우크라이나를 통치하던 소련정부는 이 사고를 은폐하고자 했으나 스웨덴까지 날아간 방사성 낙진으로 인해 이 사고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체르노빌 사고의 피해규모는 국제원자력사건 등급(INES: International Nuclear Event Scale)체계에서 등급 7의 ‘중대 사고 (Major Accident)’로 규정되며2011년에 발생한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가 같은 등급을 받았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현장에서 방사선 오염 낙진들을 제거하고 있는 노동자들 (출처:Reuters)
체르노빌 사건이 있은1980년대 후반부터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지배에 반감을 품게 되고 1989년부터 독립운동이 전개된다. 이는 소련 공산정권을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결국 1991년 소련의 해체와 동시에 우크라이나는 독립을 맞이하게 된다.
이 후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다른 소련연방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금융시장의 부재와 정부 지출로 인한 통화확장으로 인해 높은 인플레이션과 물자 부족 등의 경제침체를 겪는다. 2000년부터 금속, 화학품, 농산물 등의 약 50% 수출 확대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GDP는 계속 성장추세를 보여 우크라이나의 빈곤률이 2005년 8%로 떨어지는 등 전국민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된다.
그러나 2008년에는 금융위기 이후 자금 부족으로 인해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2010년에 금속 수출품 가격의 상승으로 잠깐 회복을 하지만 이 후 가장 큰 무역상대국인 러시아와의 마찰로 성장이 저하되면서 현재는 우크라이나 통화 흐브리냐 (hryvnia)의 가치 폭락과 내전으로 인해 국제사회의 경제원조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내전은 크게 친러시아 성향의 동부 우크라이나와 친유럽 성향의 서부 우크라이나간의 마찰이 극대화된 것으로 이로 인해 미국 및 EU와 러시아간의 갈등도 계속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동부와 서부 우크라이나는 오랜 기간 동안 각기 다른 지배세력으로 인해 문화와 주요 언어가 다르고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라는 독립된 한 국가로서 지속되어 온 경험이 1991년 이전까지 거의 전무하기 때문에 동서간의 소통과 융합이 큰 난관에 부딪히고 있다. 동서간의 갈등이 정치적으로 그 표면에 나타난 사건이 2004년에 발생한 오렌지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친러 계통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많은 이들은 선거조작을 의심하여 반대파 후보 빅토르 유셴코의 지지자들은 10일간 데모를 하게 되고 결국 재선거를 통해 유셴코가 2005년 대통령이 되었고 이를 오렌지 혁명이라고 한다.
2004년 오렌지 혁명 당시 데모시위를 주도하였던 율리야 티모셴코가 대치하던 경찰에게 꽃을 건네주고 있다. 율리야 티모셴코는 유셴코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총리로 임명되었다. (출처: http://ambassadors.net/)
이 후2010년 치뤄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에 재출마하였으나 친EU와 친러 계통간의 마찰로 인한 불안한 국정에 대한 책임으로 2010년 선거에서는 야누코비치에게 패배하게 된다. 이 후 러시아와의 경제적 무역 이점과 친러 외교관계를 바탕으로 대통령 야누코비치가 2013년과 2014년 EU와의 조약을 거부하자 우크라이나 전역에 유럽통합(EU)을 지지하는 유로마이단 (Euromaidan) 데모가 일어나2014년 2월 우크라이나 의회는 야누코비치를 탄핵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2014년 우크라이나 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친러 성향의 동부는 이를 반대하고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지역은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고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 정부와 전쟁을 시작한다.
지도설명: 2010년 대통령 선거에서 친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지지하는 동부 우크라이나는 붉은 색으로, 친유럽 성향의 총리 율리야 티모셴코를 지지하는 서부 우크라이나는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출처: CNN)
현재 우크라이나는 아직도 전쟁이 진행 중이며 해결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현 우크라이나의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은 크림반도 반환과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 대한 주권회복을 제창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지배해 온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지리적, 군사적 관점에서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에 가입될 경우 러시아에 미칠 파급을 생각하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배력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전망이다.
키예프에 위치한 고르셰닌 연구소에 따르면 현재 우크라이나의 국민들의 EU가입 찬성은 50%를 넘는 수준으로 우크라이나 국민들 또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경제에 미치는 실질적 영향력을 생각하여 EU가입에 대해 크게 찬성 쪽으로 기울이지 않는 조심스러운 성향을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 고난이 거듭되어 온 우크라이나가 하루 빨리 평화와 안정을 되찾아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국가의 토대가 마련되도록 기대해본다.
빈나리 유로저널칼럼니스트
- 런던 소재 국제금융기구 유럽개발부흥은행
(EBRD) 근무
- 유럽,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등 EBRD의
26개 개발도상국 관련 업무 담당
- 미국 코넬 대학 졸업
- 일본 와세다 국제 관계학 석사 MA
(일본 정부 장학생) 및 영국 캠브리지 경영학
MBA (영국 정부 장학생) 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