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가 사랑한 예술가 1 ; 검은 피카소, 바스키아 2
3. 흑인 영웅의 거침없는 질주
20살이 되었을 때 그는 1980년 '타임 스퀘어쇼 Times Square Show’ (맨해탄 미드타운 근방의 빈 건물에서 열린 그룹 전)에 참가해 많은 호평을 얻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Flyer for the Time Square Show. New York, 1980
이어 화랑업자 브루노 비숍벨거와 전속계약을 맺었고 단숨에 떠오르는 신예 미술가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유분방한 그의 작품에 열광했다.
인기에 힘입어 다운타운 미술계이야기를 담은 영화 뉴욕 비트의 주인공도 맡았으며, 1981년 이태리 갤러리아 아르테 에밀리오 마촐리(Galleria d’Arte Emilio Mazzoli)에서 ‘SAMO’란 이름으로 첫 개인전도 열었다.
장 미셸 바스키아 자화상
이후 뉴욕의 PS1 '뉴욕/뉴 웨이브'전을 통해 20명의 예술가들과 함께 참여, 총 20여 점의 드로잉과 회화를 선보이면서 개인적인 명성을 쌓아나갔다.
Mona Risa, 장 미셸 바스키아, 1983
이를 통해 1985년에는 뉴욕타임즈에서 주목 받는 작가가 되어, 잡지 커버에 사진이 실리고 "새로운 미술, 새로운 돈 : 한 어메리칸 화가의 마케팅"이란 제목으로 글도 실렸다.
사진을 보면 맨발에 정장양복을 입고 손엔 붓을 든 채 레게머리를 한 바스키아가 비스듬한 시각으로 앞을 보고있다. 뒷배경으로 그의 작품 판넬이 보이고 약간은 인위적인 모습의 어떤 연예인이나 모델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역시 그답게 확실한 자신만의 색깔을 풍겨낸다.
이후에도 머드클럽에서 키스 해링이 기획한 ‘로워 맨하탄 드로잉전시회’, '브래스웨이트 퓨처라’ –언어를 넘어서: 낙서에 기본하고 뿌리를 두고, 영감을 받은 작품들 (Beyond Words: Graffiti Based- Rooted inspired works)을 선보였다.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에 최연소 작가로 참여하였고, 1983년에는 휘트니비엔날레에도 참여했다. 같은 해에 Akira Ikeda Gallery에서 앤디 워홀, 프란체스코 클레멘테와 공동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1984년에는 뉴욕현대미술관(MoMA) 재개관전 –최근 회화와 조각의 국제전(An International National Survey of Recent Painting and Sculpture), 에딘버그의 프룻마켓 미술관 전을 열었다.
1986년에는 칼 하엔라인 기획의 하노버미술관 전시 외 다수의 갤러리 및 미술관 전시에 참여하였다. 한국에서는 1991년 경주 아트선재센터에서 앤디 워홀과의 2인전과 국립현대미술관 순회전 등을 통해서 이미 많은 작품들이 선보인 바 있다.
4. 동성애 스캔들
1) 팝아트의 천재 악동 게이 키스 해링
어떤 흑인도 결코 해내지 못했던 백인 예술계의 중심부에 들어가게 된 바스키아는 고가 브랜드의 옷을 입고 퍼스트 클래스 좌석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그 자신의 꿈처럼 부를 맘껏 즐겼다. 그리고 그의 작업실 입구에는 아직 채 물감이 마르지 않은 그의 그림을 가져가려고 화상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을 정도로 자신의 희망처럼 스타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유명세와 함께 스캔들도 만들어 냈다. 바스키아의 곁에는 그의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바로 키스 해링과 앤디 워홀이다. 이들의 관계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에 수시로 이들의 사이를 의심하는 스캔들이 불거지기 일쑤였다.
키스 해링,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
바스키아는 알 디아즈와 헤어지고 난 후, 소호 곳곳에 스프레이로 “SAMO는 죽었다”라는 글을 쓰고 다녔다. 그러다가 1979년 가을, 케니 스카프를 통해 평소 낙서미술에 굉장한 열정을 가지고 바스키아의 작품 세계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했었던 네오 팝 아티스트 키스 해링이 바스키아와 처음 만났다.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은 ‘SAMO를 위한 추모식’을 열어주며 바스키아와 함께 유명 클럽들을 같이 다녔다. 그러나 바스키아는 키스 해링에 대해 친구이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사이도 아닌 것 같은 매우 혼란스럽고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키스 해링이 소호 화랑가에 자신의 낙서화를 전시할 수 있게 도와 준 것과 낙서화의 대중화를 위해 애써준 것에 대해서는 무척 고마워하면서도, 정작 해링의 작품에 대해서는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다고 느끼며 ‘교과서적인 예술’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Untitled, 키스 해링, 1985
흑인이었던 바스키아가 주류 미술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낙서화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했던 반면, 키스 해링은 게이였으며 백인이었기 때문에 낙서화를 낭만적으로 미화시킬 수 있었다.
키스 해링은 뉴욕의 거리, 지하철, 클럽과 댄스홀 등에 그린 자신의 그림처럼, 그래피티(Graffiti)라는 길거리 낙서문화를 하나의 예술분야로 끌어올린 그래피티 예술가이다. 사회적인 메시지를 단순하면서도 통통튀는 재미난 그림으로 표현해, 길거리의 벽에 있는 낙서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후에 개인전을 통해 아티스트로 발돋움 하게 되었다.
뉴욕거리에 있는 키스 해링의 작품
그는 하위문화로 낙인찍힌 낙서화의 형식을 빌린 새로운 회화 양식에 간결한 선과 강렬한 원색,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표현으로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런 키스 해링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바스키아의 마음은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둘은 예술가로서 서로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2) 팝 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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