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나리의 개발도상국 뉴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Bosnia and Herzegovina)

by eknews posted May 09,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 - Up Down Comment Print
Extra Form
빈나리의 개발 도상국 이야기
6.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Bosnia and Herzegovina)
 



11- 1.jpg


국기 설명: 노란 삼각형은 국가 지형을 의미하는 동시에 세 각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이루고 있는 세 민족을 뜻한다. 하얀 별들은 유럽을 뜻하며 위와 아래의 잘린 별들은 유럽의 영속성을 의미한다. 하양, 파랑, 노랑색은 전통적으로 보스니아의 옛 국기에 자주 쓰이던 색깔로 중립과 평화를 의미한다.   
 



11- 2.jpg


지도 설명: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고 아드리안해와 접한 약20km의 해안가가 있다. 수도는 사라예보 (Sarajevo)이다. (출처: UN)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 가운데 최대 규모의 대학살이 이루어진 안타까운 나라로 잘 알려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2015년 IMF기준 GDP (PPP) 약 $394억으로 세계 108위의 경제 규모를 지닌 개발도상국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주요 산업은 철강, 전자, 광산, 목재, 섬유업 등이 있으며 인구는 약 380만명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보스니아계 (48%), 카톨릭교를 믿는 크로아티아계 (14%), 동방 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 (37%)의 세 민족으로 대부분 이루어져 있다. 보스니아의 공식언어는 보스니아어, 크로아티아어, 세르비아어로 이 세 언어는 사실 한 언어라고 해도 무방할 만큼 비슷하다. 그러나 세 민족간의 갈등으로 인해 세 언어를 각기 다른 언어로 분류하고 있다. 국명을 이루고 있는 보스니아는 북쪽 지역의 이름이고 헤르체고비나는 남쪽 지역의 이름으로 각기 다른 지역명일 뿐 지리적 및 정치적으로는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들이 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계들이 사는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나뉘어져 있다.
 




11- 3.jpg


지도설명: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들이 주로 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지역은 살색으로, 세르비아계들이 사는 스릅스카 공화국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보스니아는 기원전 1-2세기 경 크로아티아와 함께 로마의 달마시아 지방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게르만계 코트족 (4-5세기), 비잔틴 제국 (6세기), 슬라브족 (7세기), 헝가리 등의 다양한 타민족의 지배를 거친 후 드디어 13세기에 약 260년간 독립된 기독교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1463년부터 약 450년간 당시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던 터키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게 되고 이 기간 동안 오스만 제국의 사회적 혜택을 누리고자 많은 이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며 보스니아의 엘리트층으로 성장한다.


19세기 무렵부터 터키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보스니아는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 융합하며 사는 다종교·다민족 사회로 자리잡게 된다. 한편 보스니아와 달리 슬라브계가 주를 이루었던 주변국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같은 슬라브계인 러시아와 함께 터키제국과 전쟁을 벌여 1878년에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러나 러시아가 발칸반도를 차지하는 것을 견제하고자 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터키제국 소속이었던 보스니아를 합병하면서 보스니아를 차지하고자 했던 세르비아와 앙숙지간이 된다. 두 나라간의 적대관계는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인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부인을 1914년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하는 사라예보 사건 (Assassination of Sarajevo)을 통해 극대화된다.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최후통첩과 함께 세르비아를 침공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이 시작된다. 결국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동맹군이 패전하면서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및 주변 발칸국가들과 연합하여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건국한다.
 


11- 4.jpg


그림 설명:  1914년 7월 12일자 이탈리아 신문 ‘Domenica del Corriere’ 에 실린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부인의 암살 장면. 이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 (1914-1918)의 시발점이 된다.
 


제 2차 세계 대전 (1939-1945) 발발 후 유고슬라비아는 1941년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게 되고 보스니아는 나치에 동조하였던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파시스트 정권의 통치하에 놓이게 된다. 이 때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는 소련 공산군의 지원으로 우스타샤에 격렬하게 대항하고 1943년 공산주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를 국가원수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편입된다. 강력한 공산주의 이념 아래 각 나라와 민족간의 갈등은 잠시 불식되는 듯 하였으나 1980년 티토의 사망 이후 경제적 악화와 소련 및 동독일의 공산정권 붕괴로 인해 유고슬라비아는 서서히 분열되고 각 국가들은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보스니아 또한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계 인구 중심으로 이루어진 국민투표를 통해 1992년 유고슬라비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인구의 31%를 이루고 있었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 붕괴를 원치 않았던 세르비아의 지지를 받아 곧바로 보스니아 전쟁 (1992-1995년)을 일으킨다.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은 사라예보 및 보스니아의 각지를 점령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보스니아계과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인들도 맞서 싸웠으나 세르비아의 강력한 군사적 도움을 받은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이 큰 우세를 이루었다. 크로아티아 또한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인들과의 연합을 발판삼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일부분의 영토를 원하며 크로아티아-보스니아 전쟁 (1992-1994)을 일으킨다.

전쟁 중 특히 이슬람계 보스니아인들을 대상으로 인종청소, 민간인 대량학살, 집단강간, 약탈, 방화, 생매장, 고문, 수용소 강제 이송 등의 끔찍한 반인륜적인 전쟁 범죄가 자행되었고 결국 이를 보다 못한 미국과 북대서양 조약 기구인 나토 (NATO)가 1995년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이 점령한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습하면서 휴전상태에 들어간다. 결국 같은 해에 미국이 주도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간의 데이튼 평화 협정을 통해 피비린내 나는 보스니아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고 보스니아는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아계들이 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계들이 사는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11- 5.jpg


사진 설명: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 정치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 (왼쪽) 와 보스니아 전쟁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슬람계 보스니아인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오른쪽). (출처 toal.org)



1996년 국민투표를 통해 1995년의 데이튼 협정에 서명한 보스니아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Alija Izetbegović) 가 보스니아의 세 민족을 대표하는 리더로 재선출되지만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리더인 라도반 카라지치 (Radovan Karadžić)를 지지한다. 그러나 이 후 국제형사재판소는 카라지치를 비롯한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정치가 및 군사지도자들을 전쟁 범죄자로 지명하며 집단 학살, 강간, 폭행, 약탈 등의 용의로 기소한다. 카라지치는 13년간의 도주 끝에 2008년 체포되었고 기소된 지 21년 만에 2016년 국제유고전범재판소 (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에서 40년형을 선고받았다.

카라지치가 지시한 가장 끔찍한 참극은 1995년 보스니아의 동부 스레브레니카에서 벌어진 대학살 (Srebrenica massacre)로 이로 인해 8000명 이상의 이슬람계 보스니아인들이 무참히 희생되었다. 이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단 학살로 기록된다. 1998년 국제형사재판소는 이슬람계 보스니아인들과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인들 또한 다수 전쟁 범죄자로 기소하였고 다양한 증거 자료들을 통해 보스니아 전쟁의 잔혹성과 참혹함이 전 세계에 알려진다.



11- 6.jpg


사진 설명: 스레브레니카 집단 학살 희생자들의 공공묘지. 2003년에 마련된 이 추모 묘지에 약 6000구 이상의 시신이 잠들어 있다. (출처: Dimitar Dilkoff/AFP/Getty)



종전 후 국제 사회는 데이튼 협정에 의거하여 보스니아 내의 민족 갈등을 해결하고자 1995년부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주재 수석 국제행정관 (International High Representative for Bosnia and Herzegovina)을 임명한다. 특히 2002-2006년간 임기를 맡은 영국의 패디 애쉬다운 경 (The Lord Ashdown of Norton-sub-Hamdon) 은 스릅스카 공화국의 최고 국방위원회(Supreme Defence Council)를 해체시키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스릅스카 공화국의 헌법을 개정하여 각자 독립국으로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시도를 무마시키는 한편 각 정부의 부정부패 척결에 힘써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화합을 도모한 공로를 인정받는다. 2004년에는 전쟁 중 파괴되었으나 한 때 다민족 평화의 상징이었던 모스타의 다리가 재건되면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국제사회에 다소 희망적인 뉴스를 안겨주기도 했다.

 


11- 7.jpg


사진 설명: 16세기 터키 오스만 제국 시대에 건축된 모스타의 다리는 이슬람계 마을과 기독교계 마을을 잇는 다리로 오랫동안 보스니아의 상징적 건축이었다. (출처: UNESCO & Sinisa Sesum)


 
이 후로도 세 민족간의 정치적 갈등은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오랜 논의 끝에 결국 세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2011년 12월 새로운 통합 정부를 출범하기로 합의한다. 그러나 정부의 부정부패와 높은 실업률 등으로 인해 사라예보 및 각지에서 데모가 일어나는 등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양상이 지속된다. 2014년 5월에는 석 달치 내릴 분량의 비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최악의 홍수가 발생하여 보스니아 전역에 약 50만 명이 대피하고 식수 및 물자 부족 등의 비상 사태가 벌어진다. 이러한 재난 가운데서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2015년 3월 유럽연합(EU) 가입을 위한 안정화 협약 (Stabilisation and Association Agreement)에 재서명하고 드디어 2016년 2월 유럽연합 가입 신청서를 제출한다. 
 
유럽부흥개발은행 (EBRD) 리포트에 따르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2015년 GDP성장률은 2014년 성장률인 1%에 비해 다소 증가한 2.8%로 비록 홍수로 인해 20억 유로 가량의 경제적 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출 증가와 특히 도소매업, 공공행정, 건설업, 인프라 및 에너지 산업의 수익률이 전체적으로 성장을 이끌고 있다. 또한 EU와의 협정으로 2015년 7월에 도입한 6가지 부문 – 공공재정, 세금안정, 기업환경 및 자유경쟁, 노동시장, 사회보장 및 연금 - 에서의 새로운 개혁안이 시행되면서 정치적, 경제적 개혁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앞으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경제가 발전되기 위해서는 우선 기업들의 사업과 투자를 장려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 은행이 2016년에 발표한 비즈니스를 하기 좋은 국가 순위 리포트에 따르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창업률, 건축허가율, 전기 공급률 및 세금 부담율 부문에서 낮은 순위를 기록하며 총 189개 나라 중 79위에 머물렀다. 따라서 친기업적 환경 조성과 함께 2015년 7월 새로 시행된 노동법을 통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높은 청년 실업률을 감소시키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한 사안이다. 대기업의 민영화 또한 앞으로의 추진 과제로 남아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정부는 2015년 2월 유명 제약회사, 알루미늄 제조회사, 엔지니어링 회사 등의 대형 회사들의 지분을 처분할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아직까지 현실화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부실 채권률 (NPL)은 2013년의 15.1%에 비해 다소 감소하여 2015년에는14%를 기록했으나 은행 거버넌스와 금융감독의 강화 등을 통해 그 비율을 더욱 최소화 해 나가야 할 것이다.
 
전쟁의 슬픔과 아픔을 딛고 지금까지 정부·경찰·행정 개혁 및 국제사회와의 협조 등을 통해 서서히 사회 융합과 건설을 위해 노력해 온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과거의 상처에서 온전히 벗어나 수준 높은 다민족•다문화 사회 통합과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있길 기대해본다.  
    



저자 빈나리: 런던 소재 국제금융기구인 유럽개발부흥은행  (EBRD) 근무. 유럽,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등 EBRD의 26개 개발도상국 관련 업무 담당. 미국 코넬 대학 졸업, 일본 와세다 국제 관계학 석사 MA (일본 문부성 정부 장학생) 및 영국 캠브리지 경영학 MBA (영국 쉐브닝 정부 장학생) 수학.
 


유로저널광고

Articles

68 69 70 71 72 73 74 75 76 77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