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혜 예술칼럼

예술가가 사랑한 예술가 1 ; 검은 피카소,바스키아 3

by eknews posted May 1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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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가 사랑한 예술가 1 ; 검은 피카소, 바스키아 3

    


2) 팝 아트의 대가 앤디 워홀


•    첫만남


바스키아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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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와 장 미셸 바스키아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갔던 뉴욕현대미술관 MOMA의 피카소 작품 게르니카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엄마의 모습을 보며 화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바스키아가 막 성인이 되었던 시기는 미술사에서 많은 사조들이 난무했던 때였다. 특히 전쟁이 완전히 잠식되고 1960년대부터 일어난 젊은 층의 반발 심리는 극에 달해 있었다.


미국에서는 브롱크스의 뒷골목에서 수많은 십대들이 붓 대신 스프레이통 하나만을 들고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그래피티 예술(Graffiti art)이다. 이렇게 사회의 바닥에서 혼란의 물결이 일고 있기 이전에 미술계에서는 팝 아트(Pop art)가 공식적으로 활성화되어 대중과 예술이 상업 미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다.


즉, 앤디 워홀(Andy Warhol)이 주를 이루던 미국의 1970년대 후반의 미술계는 소위 상위예술과 하위예술이 상충하며 소용돌이를 만들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것의 교집합이 이루어지던 바로 그 역사적인 순간에, 워홀은 묵묵히 자신을 길거리에 표현하던 흑인 화가 바스키아에게 관심을 가졌다.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의  첫만남은 어느 레스토랑에서 이루어졌다. 앤디 워홀이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 들어간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에게 자신이 그린 엽서를 내밀며10달러에 사라고 말했다.


엽서들을 훑어본 워홀은 “손이 많이 가지 않은 그림이군” 이라 말하고는 한 장을 샀다. 이것이 그들의 짧은 첫 만남이었다.



•    소울메이트


그들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몇 년이 지난 후 바스키아가 미술계의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을 때였다.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을 통해 미국의 유명한 화상과 거부들을 소개받으면서 더욱 유명해지고 싶은 그의 소원을 이루어갔다.


그는 평소 명성이 높고, 흥미로운 삶을 살고 있으며 많은 유명인사와 친분을 쌓고 있었던 앤디 워홀을 다른 누구보다도 재능이 뛰어난 예술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워홀을 향한 바스키아의 노력으로 둘은 마음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누는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작품마다 혁신적이라는 칭송과 거대한 스캔들을 동시에 일으켰던 앤디 워홀은 이미 스타 중의 스타로 팝 아트의 대가였다. 하지만 어린 바스키아보다 현저히 높은 위치에서 그를 내려다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감은 없는 듯 보였다.


워홀을 만났던 당시에 바스키아의 생활은 아주 불안정했었다. 그는 작품들을 고가로 팔아 번 돈의 대부분을 마약에 썼다. 마약과 여자는 당시 바스키아에게 있어서 떼어놓을 수 없는 그의 삶의 일부였다.


워홀은 그런 바스키아를 걱정하고 다독이며 함께 공동 작품을 하자고 설득했다. 워홀이 실크스크린으로 찍거나 붓으로 그리면 바스키아도 역시 옆에서 함께 그리는 방식으로 작품들을 완성해 나갔다.


워홀은 바스키아에게 있어 그가 늘 꿈꾸던 거침없는 미술계로의 첫 발을 내딛게 인도해 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나이가 든 그런 워홀에게 바스키아는 젊음의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둘은 함께 작업을 해나갔다.



•    흑인 영웅의 반항


워홀과 뉴욕 미술 시장은 그가 검은 피부를 가졌다는 것에 주목했다. 상품에 주력하는 갤러리들은 바스키아만큼 세상을 흔들게 할 흑인 화가가 없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바스키아는 화랑이 아닌 뒷골목에서 그래피티 아트를 선보일 때부터 자신의 태생을 숨기지 않았다. 그가 그리는 그림의 모든 주제는 인종, 특히 흑인 사회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 바탕을 둔 대중의 일방적인 사고를 비판하는 작업들이었다.


즉,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바스키아가 추구하는 반항적인 작품 세계와 당시 미국 미술계가 필요로 했던 혁신적인 분위기가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이다. 이와 맞물려 바스키아의 그림은 수많은 주간지들을 장식했고 동시에 그의 그림가격 또한 날개 돋친 듯이 상승했다.


마침내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거리를 떠돌던 반항아적 존재였던 바스키아를 ‘흑인 영웅’으로 추앙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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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er, 바스키아, 1981



그의 작업에 있어서 상징은 굉장히 많은 작용을 했고, 그의 작품은 암시적인 이분법적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 예를 들어 부와 가난, 통합과 분리, 내면과 외면, 이미지와 텍스트, 추상과 형체, 역사적 정보와 현대비평을 긴밀히 결합시키곤 했다. 물론 자신이 그리는 그림 모두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바스키아는 작품 전체에 있어서 몇 가지 단락을 나누어 그것을 반복해갔다.


가장 많이 등장했던 소재는 바로 바스키아 자신이 뿌리라고 생각했던 흑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뉴욕 일대에서 자라오며 보았던 많은 도시적 이미지를 작품에 차용하고 그 끄트머리에 왕관이나 저작권을 상징하는 기호(©)등을 표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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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당시 미국 사회가 보여주는 백인 우월주의적인 사고방식 위에, 자신의 작품에 대한 존경, 그리고 작품 속 많은 흑인들에 대한 존경심을 덧칠해 사회에 대한 강한 반발을 표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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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mond, 바스키아, 1984



두 번째로 자주 다뤄졌던 소재는 죽음이었다. 바스키아가 공식적으로 활동했던 1980년대 초반부터, 그가 죽기 직전이었던 1980년대 후반까지 거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는 죽음을 다루었다.


흥미로운 것은 바스키아가 죽음에 대해서 내렸던 태도에 있는데, 그는 죽음에 대해서 철학적인 접근을 하는 대신 죽음과 상관없는 다른 키워드를 끌어내어 그것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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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RKR, 바스키아, 1982



바스키아는 인간의 무의미에 대한 무거운 이런 소재를 금전의 가치와 결부시키는 것을 즐겼다. 특히 그는 인간이 자원을 사용하고 남용하는 행동에 대해서 비판적이었고, 인간의 식재료로 사용되는 동식물과 그것들의 이용가치가 과연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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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 바스키아, 1982



이런 작업을 통해 바스키아는 일종의 평화적 메시지를 표출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앤디 워홀과 다수의 시간을 보내며 그의 그림을 빌려 넣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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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전적 가치와 사물의 가치에 대한 작품, 바스키아와 워홀이 함께 작업한 그림



•    영화 <바스키아>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메일 : choijihye107@gmail.com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페이스북 : Art Consultant Jihy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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