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혜 예술칼럼

< 예술가가 사랑한 예술가 2 > 아시아 앤디워홀, 무라카미 다카시 ( 2 )

by eknews posted Jun 12,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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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가 사랑한 예술가 2 >
아시아 앤디워홀, 무라카미 다카시 ( 2 )



2) 오타쿠란?

무라카미 다카시가 일본미술의 고유 전통과 연결시킨 현대의 하위문화인 오타쿠 문화란 무엇일까? 오타쿠 세계의 가장 중심에 있는 사람들도 이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정의하기 어렵다. 특히 이것에 대해 일본인이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더욱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오타쿠의 정의는 정해져 있지 않다. 때에 따라 다르며, 논자에 따라 말의 의미가 일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라카미 다카시는 말한다. “오타쿠 문화의 중심은 만화다.” 그는 만화에는 문장과 문법이 있다고 하면서, “이 두 가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으면 그림을 읽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또한 자신이 이런 오타쿠 문화를 가지고 유명해질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게임에서 그 규칙을 익히면 금세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내가 세계적인 스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오타쿠 문화의 중심에 속한 이들의 감성으로, 그들 그림의 에센스를 간략화하고 정리해서 이런 것은 어떤 의미이기도 하지만 다른 어떤 방향성도 있다는 식으로 분류학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정작 오타쿠 세계에 속한 원주민들은 그런 분류학 따위는 필요 없다며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원래 오타쿠의 기원은 일본의 엘리트 집단인 게이오 대학의 SF연구회에서 시작됐다. 부르주아였던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이런 하위문화를 즐겨보는 것은 어때?”라는 행동이 이것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실제로 오타쿠는 늙은 여성들이 자신을 비하해서, 상대방을 일컬을 때 ‘옥사마’, ‘오타쿠’라고 말하는 단어이다. 이것을 게이오 대학의 연구회에 있는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이다. 또한 이것을 하위문화 평론가 나카모리 아키오(Akio Nakamori)가 버릴 수 없는 말이라고 해서 『망가 브릭코(-漫画ブリッコ)』라는 포르노 잡지에서 이것에 대한 해설을 썼던 일이 있었다. 


이후 그것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오타쿠 문화는 SF와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보고 체험하는 사람들의 문화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오타쿠가 애초 매우 높은 계급의 게이오 대학에서 나왔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무라카미 다카시가 동경대학을 다니던 시절, 당시 게이오 대학과 동경대학에는 많은 오타쿠가 있었다. 인터넷 시대가 아니었던 그 시기에는 기억력이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SF의 어떤 구절을 인용해 얘기할 수 없으면 친구끼리 대화를 이어나갈 수도 조차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기억력이 매우 나빴던 다카시는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머리좋은 친구들의 대화에 아예 끼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타쿠적인 콘텐츠를 아주 좋아했었다. 그래서 멀리서 오타쿠 친구들의 대화를 지켜만 봐야했던 오타쿠가 될 수 없었던 오타쿠가 된 것이다.




3) 약삭빠른 상업주의자

무라카미 다카시가 현재 국제적으로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현대 미술가중의 한 명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에서 출발해 세계를 순회한 회고전을 비롯해, 세계의 저명한 미술관은 물론 베르사유 궁전과 록펠러센터 앞 광장 등 다양한 장소에서 설치미술도 전개했다. 특히 그의 설치작품은 압도적인 스케일감과 높은 완성도로 전세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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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록펠러 센터 앞 무라카미 다카시 전시 전경(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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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 궁전에서의 무라카미 다카시 전시 전경(2010)




그러나, 그는 아시아의 앤디워홀로서, 자본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그것의 속성을 잘 알고 이용하는 영리하고 약삭빠른 작가, 상업주의에 속한 작가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더구나 일본 사회 내에서 그의 인간적 존재감은 더욱 부정적이다. 오타쿠 문화를 앞세워 외국에서 돈을 벌고 있다는 매우 '부도덕한 인간'이라는 수식어가 그를 따라 다닌다.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표면만 차용해 서양적인 예술에 접목시켜 세계적으로 거짓말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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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다카시



게다가 1990년대 일본의 거품경제 이후 사회풍조는 아트 비즈니스를 해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 사기꾼이 되고 악(惡)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은 그의 활동을 보며, 사기꾼이 외국에 거짓말을 하러 가고, 그 거짓말을 듣고 세계 사람들이 좋아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오타킹’이라 불리는 오카다 도시오(Toshio Okada)는 한때 무라카미 다카시가 오타쿠를 바보 취급하고 착취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 사회에서 그의 존재감은 아주 부정적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비평에 대해 별로 크게 개의치 않고, 오히려 이국의 문화, 개인의 문화가 다른 장소로 이동했을 때 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세계적인 흐름이고 당연한 것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4) 그의 또 다른 도전   

2015년 그는 14년만에 도쿄 모리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전시에서 그는 자신이 불교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오백나한도(The 500 Arhats)"를 일본에서 최초로 공개했다. 이것은 세계의 회화 역사상 최대 규모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총 길이 100m에 달하는 초대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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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나한도(The 500 Arhats), 무라카미 다카시, 2012



이것은 동일본 대지진 후에 신속하게 지원해 준 카타르에 대한 감사를 담아, 지진 재해의 다음 해인 2012년에 도하에서 발표된 작품이다. 3만 명이 즉사하고 그 이후 후쿠시마 원전이 폭파해 다량의 방사능 재가 동경에 날아왔던 동일본대지진은 일본 내의 현대미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고, 최근에 다양한 방식으로 작업에 등장하고 있는 이슈다. 


그러나 정작 일본 정부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쉬쉬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사회가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무라카미 다카시는 아티스트라는 직업의 사람들은 사람들의 위안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3.11 동일본대지진 이후 데미언 허스트, 제프 쿤스와 함께 자선 경매를 통해 기부를 하는 등 여러 활동을 했다. 그리고 지진 이후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결심해 이전까지 했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벗어나 조금 더 개인적이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작업을 하고 있다.


즉, 초기 작품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의 예술이 가진 머니 게임 같은 주제를 내세웠다면, 그것과는 다르게 최근 작품들에선 개인적인 부분, 그가 탐구하고자 하는 부분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한 일환인 작품 “오백나한도”를 중심으로 새롭게 일본미술의 전통을 다룬 신작들로 구성된 2015년 일본 개인전시는 성숙기를 맞이한 그의 놀라운 스케일과 에너지를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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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on Peering into Death's Abyss, 무라카미 다카시, 2015



5) 실체가 없는 철학적 질문을 계속 해야 하지 않을까?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메일 : choijihye107@gmail.com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페이스북 : Art Consultant Jihye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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