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여행 - 고갱과 함께 ( 1 )
고갱의 회화의 여정은 몽빠르나쓰에서 후앙으로, 덴마크로, 파나마로, 마르티나크 쌩 삐에르로 빠리로, 브흐따뉴 뽕따벤으로, 아흘르로, 타이티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궁핍과 우울과 고독가운데 죽기 위하여 마흐끼즈 섬으로 들어 갔다.
돗단배들 1884년
“색깔은 음악과 같이 진동이다”
-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자연가운데 보다 특이한 것으로 시작해서 보다 일반적인 것으로 도달하는 음악과 같이 자기 내면의 힘을 색깔을 통하여 보여준다.
그는 아주 특별하게 핑크 빛을 사용하는 법을 보여준다. 그는 점점 쪽 빛 인디고와 노란 레몬 색에 빠져든다. 오크르 붉은 빛의 깊은 색감을 사랑하고 아주 장중하고 날카로운 녹색의 균형을 잡아준다. 불협화음으로 거의 귀가 멍멍한, 어두운 색감의 하모니를 보여준다. 모든 색깔 속에서 회화가 내는 소리를 듣고 싶은 강한 바램을 그린다.
색깔의 합주곡에 사람들은 놀라고, 사람들은 빠져들고, 사람들은 즐긴다.
팔레트를 들고 있는 자화상 1889
인디언의 피가 흐르는 폴 고갱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클로비스 루이 고갱과 스페인계 남미의 페루 출신 어머니 알린 사갈 사이 빠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갱의 아버지는 공화파이며 급짐적인 신문 나쇼날의 기자였다.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이 1851년 쿠테타로 황제에 즉위하자 정치적 탄압을 피하여 페루의 리마로 망명하던 중 불행하게 심장마비로 선상에서 사망한다.
고갱은 어머니, 누이와 같이 어머니의 고향 리마에 정착한다. 세 살부터 일곱 살 사이의 유년 시절의 페루 체재는 고갱의 인격 형성과 예술가적 성장에 라틴 아메리카 인디언의 기질을 가져다 주었다. 이국적인 열대 밀림의 풍경이 가져다 주는, 먼 잉카 제국의 전설의 색깔과 이국에 대한 그리고 여행에 대한 고갱의 집념은 어린 시절의 고향과 혈통에서 나왔다.
7세에 프랑스로 돌아와 오를레앙(orleans)에서 그는 소신학교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배를 타고 바다로
1865년(17세)에 외항 상선을 타고 1866년(18세)에 2등 항해사로서 항해에 나선다. 르 아브르 항구는 1848년 에두아르 마네도 선원으로 배에 올랐던 항구다. 그는 선원이 되어 지구를 두 바퀴돌았고 어린 시절 보았던 대륙을 다시 보았다. 그는 이 시절 행복을 느꼈다. 그는 마젤란 해협(le détroit de Magellan)을 지나 화민 항구(Port -Famine)에 가서 아버지의 묘소에 참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파나마로 향했다. 폴리네시아의 섬들과 인도를 항해하다 1867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는다.
1868년 해군에 입대, 1871년 프러시아 전쟁에도 가담했다. 3년의 병역도 마치고 지중해의 군사 항구 뚤롱에서 전역하였다.
증권거래서 직원으로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고갱
주말화가, 삐싸로의 제자로 보낸 인상파 시기 1874-1886
1870-71년 프러시아 전쟁 이후 고갱은 제로에서 다시 인생을 시작한다. 1871년 4월부터 가족의 친구인 구스타브 아로자씨의 추천으로 베르뗑의 증권 거래소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나름대로 안락한 삶을 누리며 덴마크 출신의 아내 메트 소피 가트(Mette-Sophie Gad)와 결혼하여 아이를 다섯 갖는다.
이 기간에 그는 아로자씨를 통하여 예술 세계로 들어간다. 그는 드라크르와의 작품을 비롯하여 많은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아로자의 영향으로 그는 1874년부터 직접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아마추어 화가로 회화에 입문한다.
후원자 구스타브 아로자의 권유로 인상파들과 교류를 갖게 되고 그리고 이 당시 아로자의 집에서 삐싸로를 만났고 그는 고갱을 인상파 풍경화에 입문시켰다. 그리고 그림의 구도에 의미 그리고 색깔에 관하여 지도해주었다. 역사에 가정은 있을 수 없지만 당시 새로운 화풍의 인상파가 없었다면 아마 고갱의 예술 세계도 피어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고갱은 미술학원이나 미술학교 등의 정규 회화교육을 받지 않았다.
1875년 눈오는 날 이네나 다리에서 세느강 풍경(오르쎄 박물관)
같은 기간 사무실에 근무하는 동료 아마추어 화가 에밀 쉐훼네케르(Emile Schuffenecker)와 교외로 그림을 그리러 주말에 나가곤 하였다. 이 동료는 고갱의 어려운 시기에 많은 도움을 주게된다. 초기 고갱은 꼬로의 풍경스타일을 좋아하였다. 그의 작품은 1876년 살롱전에 입선하였다.
1879년 주식에서 성공해서 인상파 작품들을 사들이며 소장가가 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세잔, 마네(Manet), 삐싸로(Pissarro), 르느와르(Renoir), 시슬레(Sisley), 기요멩(Guillaumin), 까싸트(Cassatt), 드가(Degas), 세잔(Cézanne), 모네(Monet)의 작품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삐싸로와 드가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터워졌다. 특히 드가는 나중에 고갱이 어려워졌을 때 작품에 대한 견해 차이는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꾸준히 사주었다.
고갱의 작품에 그려지는 야외의 빛이 의미와 색깔의 밝음은 인상파 동료들의 영향력이다.
그리고 인상파들과 함께 1876, 1880, 1881, 1882, 1886에 다섯 차례 전시회에 출품하였다.
1881년 출품한 알몸에 관한 연구, 또는 바느질하는 수잔(Etude de nu ou Suzanne cousant)이 살롱전에서 주목 받았다.
비평가 위스만은 이 작품에서 사실주의의 정상에 올라 있는 고갱을 보았고 멀리는 꾸르베를 넘어서 밧세바 여인을 그린 렘브란트의 천재성을 보았다고 극찬하였다.
동시에 마네를 연상시키는 정물의 특징과 배치, 알몸 연구와 바느질의 일상의 동작들은 드가의 사실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빛의 뉘앙스의 풍부함과 알몸 피부에 푸르고 녹색빛이 도는 어두움은 르느와르의 작품과 가깝게 느껴진다.
전업 화가로 초기에 받은 인상파의 영향력에 대하여 인상파와 1888년 단절한 이후에도 그들에 대한 감사는 결코 잊지 않는다. 특별히 고갱은 삐싸로, 드가. 세잔에게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특별히 세잔의 정물은 그 무엇보다도 더 애지중지하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홀로 있는 거야 J. Rostand
전업 화가로 인생 전환 - 아내와 다섯 아기는 운명에 맡기고 가족생활을 단절한 것처럼 일상의 직업 생활을 단절하고 자기가 속한 모임이나 크게는 자신이 성장해온 문화와 문명과도 단절을 결정한다. 그리고 자기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며 현대를 열어간다. 20세기의 전위 작가들은 모두 고갱에게 빚을 갚아야 한다.
증권회사 직원 생활은 1882년 주식시작 붕괴로 마감한다. 고갱은 소질이 있는 주말화가에서 전업화가로 진로를 전환한다. 이제 그는 가장으로 다른 직장을 찾기 보다 "이제는 나는 매일 그림을 그릴거야"라고 선언하였다.
나이 34세에 뒤늦게 전문 화가로 출발한 그는 자기의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창조하여 자신의 예술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싶었다.
1882년 1월 18일, 삐싸로에게 보낸 편지
- 오늘 아침 편지 잘 받았어요. 안개가 당신의 모랄에 영향을 주고 있는 듯 하네요. 검은색을 갈고 있는 것 같은데요. 당신은 더 이상 검은 색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 경제적으로 직장에서 해고 되고 전적으로 그림으로 먹고 살 수 있도록 삐싸로 당신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나는 가족이 많고 아내는 궁핍함을 견딜 수 있는 여인이 아니네요
-1 884년, 후앙으로 이사갈거야. 생활비가 싼 대신 그림에 보다 전념할 수 있고. 대신 그림을 팔아야 하네. 자네가 아는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어야 하네
사계절 옥탑방에서 테오
bonjourbib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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