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의 삶을 흔들어 놓는 예술가 1 >
싸이 톰블리 ( 2 )
3. 역사 속에 새로운 돛을 달고 항해를 시작하다
이러한 이탈은 당대의 시각으론 이해가 어려운 결정이었으나 그의 그 결단은 지금의 톰블리를 있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추상표현주의에서 미니멀리즘과 팝아트의 세계로 옮겨가던 미국 미술계의 흐름과 관계를 끊은 채 이탈리아에서 톰블리는 외롭게 자기만의 세계에 몰두했다. 당시 이것은 톰블리에게 상당한 부담감과 데미지를 줄 수 있는 큰 모험이었다.
실질적으로 이 선택은 미국 화단에서 싸이 톰블리라는 작가의 이름이 동시대 작가들에 비해 아주 뒤늦은 시기에 조명되었던 직접적인 이유로 작용했다.
이탈리아로 가기 전 그의 초기 작업은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의 흑백 회화의 영향을 받은 서정적인 추상주의를 보여주었다.
Excavation, 윌렘 드 쿠닝, 1950
Tiznit, 싸이 톰블리, 1953
하지만 시대계승적인 작업에 점차 환멸을 느낀 톰블리는 자신의 언어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이게 되면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모험을 시작할 계기를 찾게 된다. 그래서 그는 경제적인 안정을 뒤로 한 채 이탈리아로 떠났고, 그곳에서 역사 속에 새로운 돛을 달고 항해를 시작하면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4. 어린 아이가 그리는 세상
추상표현주의가 절정에 달해 전위성을 상실한 현실에 젖어 있었던 미국보다, 오히려 톰블리는 유럽 문화를 접하면서 짧은 역사를 지닌 미국과 대조되는 역사적인 고전신화와 문화 예술을 흡수하여 작품으로 소화해냈다.
특히 그는 고대 지중해 역사와 지리, 그리스 로마 신화와 서사시에서 영감을 받고 모티브를 가져와 불가사의한 세계를 작품에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레다와 백조, 미켈란젤로
이것은 미켈란젤로의 작품 ‘레다와 백조’다. 이 작품은 제우스가 백조로 변신하여 레다를 유혹하고 두 아이를 낳게 한다는 이야기를 유화로 만든 명작이다. 싸이 톰블리도 똑같은 제목으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작품을 재해석했다.
Leda and the Swan, 싸이 톰블리, 1962
서사적이고 고전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의 그림은 구체적인 이미지 없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식별하기 힘든 기호들과 글자, 선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붓을 사용한 전통적인 채색방법 대신 유백색 또는 검은 캔버스에 물감을 묻힌 손가락과 손바닥을 사용하거나 연필과 크레용을 이용하여 즉흥적인 손의 움직임을 전달하는 드로잉 방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Untitled (New York City), 싸이 톰블리,1968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는 것은 어린 아이 눈에 비쳐지는, 보이는 그대로의 모습일 것이다. 복잡하고 정신없는 뉴욕의 모습이 어린아아같은 눈을 가진 화가에겐 이렇게 비쳐졌다.
눈이 부신 네온싸인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차들의 행렬, 그리고 하늘 끝까지 닿으려는 듯한 높은 빌딩들로 검게 드리운 그림자들로 가득찬 뉴욕의 밤하늘이 톰블리에겐 이렇게 보였다.
톰블리가 말하는 Primitive Art(원시예술)라는 개념이 바로 여기에 담겨져 있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은 순수하게 곡선을 그리고 물감을 뿌리고 때로는 내가 뭘 그리는 지도 모를 정도로 낙서와 같은 의미없는 선을 반복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속에서 아름다움을 표현해냈고, 이 아름다움을 톰블리는 자신만의 해석으로 추상표현주의라는 예술의 큰 트렌드로 만들어냈다.
5. 선으로 인간의 삶을 표현하다
수수께끼처럼 식별하기 힘든 기호들과 글자들이 있지만, 톰블리의 작품을 형성하는 기본 요소는 바로 ‘선’이다. 그는 크레용, 연필, 잉크 등의 필기도구를 사용해 종이 위에 도형, 숫자, 기호 등의 요소를 채워넣기도 하고 지우기도 하면서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
그래서 거리의 낙서에서 예술적인 에너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작업에 도입한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한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희미하게 미끄러지는 듯한 글자체, 긁힌 자국이 어우러진 캔버스, 그는 이 캔버스에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사실, 우연, 목적, 놀라움 등을 담아했다.
톰블리가 이처럼 칠판에 낙서를 한 듯한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건 여행을 갖다와서 미군의 암호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발달된 아이디어였다. 톰블리는 이 밖에도 언어를 마치 회화처럼 표현해낸 부족적 예술(Tribal Art), 즉 원시아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로써 톰플리는 마치 원시 동굴에서나 발견될 법한 칠판표면을 스크래치해 만든 지극히 원시적 작품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Untitled, 싸이 톰블리
당시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형태의 그림으로, 세련된 맛도 없고 기교도 없어보이는 것들이었다.
Vengeance of Achilles, 싸이 톰블리, 1978
하지만 세계 몇 안되는 최고의 아트 딜러, 레오카스텔리는 그의 엄청난 가능성을 알아 보았다. 이로써 사이 톰블리는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로 옮기게 된다.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로 옮긴 후, 톰블리는 이탈리아 남부쪽의 게타(Gaeta)로 이주를 했다. 당시 서른이 되기 직전이었던 톰블리는 유럽 예술을 경험하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
Nine discourses on Commodus, Cy Twombly, 1963
지금은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이다.
Discourses on Commodus, 싸이 톰블리, 1963
레오 카스텔리의 후광을 받으며 사이 톰블리는 승승장구하게 되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가하기도 하고 위의 작품들을 뉴욕에 있는 레오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세계적으로 조금씩 알려지게 되자, 비판도 또한 상당히 많이 받게 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미니멀리즘 작가인 도날드 주드(Donald Judd)는 사이 톰블리 작품을 보며 "물감 좀 흘리고, 튀기고, 펜으로 몇번 쓱쓱 그은게 전부다"라고 말하며 혹평을 가했다.
6. 유동적이면서도 끊기지 않는 선들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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