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the Pop
19 Sep 2016 – 1 Oct 2016 / The Royal Opera Arcade Gallery
지난 호에서는 전후 미국을 중심으로 나타난 추상표현주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1950년대를 풍미했던 추상표현주의는 1950년대 말을 기점으로 쇠퇴하게 되는데 이는 1950년대 중반에 들어와 행위와 물질성을 강조하는 액션 페인팅의 경향과 단조로운 화면에 색채와 기하학의 형태를 위주로 하는 후기 추상의 경항이 기법상의 여러가지 문제들을 나타내게 되면서 팝아트라는 새로운 형식의 예술의 발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팝아트는 2차 세계대전 후 산업이나 소비사회 등의 물음으로 형성된 환경을 수용한 예술로 적극적인 태도로 현실세계에 접근한 새로운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팝아트에서 팝이라는 명칭은 'popular'에서 유래했으며, 일상생활에 범람하는 기성 이미지인 대중적 이미지에서 제재를 취했던 미술의 경향을 일컫는다. 팝아트라는 용어는 1952년 영국의 미술평론가인 로렌스 알로웨이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원래는 매스컴이 지배하는 대중문화가 만들어내는 대중예술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지만 그 의미가 확대되면서 대중적인 이미지를 '순수 미술(fine art)'의 문맥 안에서 사용하고자 하는 미술가들의 활동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었다.
[삼성 비자금 관련 수사에서 등장한 팝아트 작품.
로이리히텐 슈타인의 ‘행복한 눈물’]
팝아트의 출현과 동시에 사실상 순수회화는 광고, 포스터, 신문, 잡지의 삽화, 만화 등이 가지는 복제성에 의해 그 유일성(Aura)은 소멸되는 위기에 처했는데, 이는 매스미디어 시대에 있어서 팝아트의 혁신성이 기존 고급미술과 저급미술 사이에 존재하는 전통적 위계의식을 타파했다는 평가가 이루어지면서 팝아트의 당위성이 인정받게 되었다. 팝아트는 고급미술의 범주안에서 하찮은 것으로 간주되어 온 모든 것, 일상적 이미지나 사물을 예술 예술이라는 관념과 상관없이 받아들였는데 오히려 이것이 순수예술의 한계와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거대한 담배꽁초(Giant Fagends)’, 클래스 올덴버그]
살펴본 바와 같이 현대문명의 비개성적인 특징을 따른 팝아트는 그 성격이 비개성적이고 이지적이라는 점에서도 현대사회의 성격을 반영한다. 비개성적 성격은 우리가 처해있는 현실인 대량생산과 대량전달이라고 하는 물질문명사회에 대한 예민한 반응의 결과였으며 또한 그들이 이룩한 조형적인 혁신의 성격에도 밀접히 관계된 것으로 종래의 예술개념을 부인하는 예술의 한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종래의 예술사조의 개념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것으로 일관성 있는 양식의 복잡성 범위나 매체의 확장, 주제의 친숙성, 오브제의 실재성 그리고 기술과의 관계 등과 같은 요소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팝아트의 회화적 기법이나 오브제 이미지들은 미술사조를 통틀어 대중에게 가장 친숙하며 현대의 많은 산업 부문에서 패러디 되거나 차용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전시사업에서도 팝아트는 이른바 스테디셀러로 손꼽힌다. 특히 앤디 워홀과 같은 팝아트의 대표적인 예술가의 작품들은 누구나가 관심을 가지고 또한 미술시장에서도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탓에 여러 갤러리들은 앤디 워홀이나 팝아트와 관련된 전시도 성황이다. 미술계에서는 앤디 워홀을 빼고는 현대미술시장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이야기할 정도이다. 지난 주, 런던에서도 앤디 워홀의 주요작품과 더불어 앤디 워홀과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받거나 워홀 작품의 모티브로 작업한 작가들을 모은 전시 "Top of the Pop"가 열려 팝아트의 인기를 증명했다.
앤디 워홀의 유산
팝아트의 대명사이자 현대미술의 아이콘인 앤디 워홀을 빼고는 전시산업을 논하기 어렵다는 말은 이미 미술계에서는 공론화된 사실이다. 그만큼 대중적인 인지도는 물론이거니와 많은 미술애호가들의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수 백만 달러를 호가함에도 불구하고 미술시장에서는 늘 품귀현상을 겪고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앤디 워홀이 작업을 하던 당시는 작가의 관념을 표현하는 추상표현주의의 주관적인 예술태도가 이미 고급예술의 대표적인 관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대중문화가 크게 확대된 상황임에도 모더니즘 미술의 대표적인 비평가인 그린버그를 중심으로 하는 비평가들은 외적인 세속성에 대항해서 더욱 예술자체만의 고유성을 획득하려 하고, 따라서 예술은 소수 엘리트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은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고, 산업기술의 편리함과 새로움에 감탄하고 있었으믈, 예술은 기존의 관념론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앤디 워홀의 ‘마릴린’]
이러한 당시의 요구에 손을 들어준 것이 팝아트였고, 앤디 워홀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으로 다른 팝아트 작가들보다도 노골적으로 더 기계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예술의 태두리 안으로 가져 들어왔다. 앤디 워홀로 인하여 미술에 있어서 어떠한 계급이나 귀족성, 관념성도 허락하지 않았고, 이후 미술에서는 그가 가장 비난 받았던 상업성이나 세속성 조차도 예술작품으로 인정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앤디 워홀은 그의 작품과 행동으로서 기존의 예술개념을 부정하고 예술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이후 미술을 이야기 할 때, 앤디 워홀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VOKA가 재현한 ‘마릴린’]
특히 비즈니스 아트 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 앤디 워홀은 산업사회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예술에 있어서도 자본주의적 속성을 기꺼이 정직하게 받아들였다.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며, 비즈니스야 말로 최고의 예술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가장 명확히 반영하였다. 앤디 워홀은 기존의 미술과는 다른 차이를 만들어 냄으로써, 미술계에 있어서 전통적인 가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고 당시로서는 큰 충격을 선사했다. 미술품을 상업시스템에 종속되는 일개의 상품으로 귀결시켰고, 상업성과 출세지상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미술가의 위상을 대중적이고 세속적인 스타의 위상으로 격상시켰다. 그와 같은 노선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데미안 허스트나 제프 쿤스와 같은 이른바 스타 작가들이다.
또한 회화적 관점에서 그의 작품을 바라보더라도 그의 영향력은 엄청나다. 그의 작품이 여전히 많은 작가들에 의해 중요하게 모방 또는 재창조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러한 지점을 조명하는 전시를 통해 팝아트와 앤디 워홀의 관계를 다시 재조명해 볼 수 있길 바란다.
오지혜 유로저널칼럼니스트
- 이화여대 미술학부 졸업
- 이화여대대학원 조형예술학 전공
- 큐레이터, 아트 컨설턴트, 미술기자, 칼럼리스트로 활동 중
- 이메일 iamjeehy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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