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유림의 문화예술 경제 칼럼

한국 페미니즘 사진의 대모 박영숙, 세상을 향한 '미친년'들의 목소리

by eknews posted Oct 09,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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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페미니즘 사진의 대모 박영숙
세상을 향한 '미친년'들의 목소리



<미술 속의 여성 - 한국의 여류 화가를 찾아서> 첫 번째 시리즈가 지난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는 동시대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매체인 사진을 가지고 작업하는 박영숙 작가를 지나친다면 1세대 페미니즘의 커다란 축을 놓치는 것이라 생각, 박영숙 작가에 대해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76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는 강렬한 포스와 아티스틱 아우라를 풍기는 박영숙 작가. 한국 미술계의 1세대 페미니즘 사진작가이며 '한국 페미니즘의 대모'로 불리는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미술시장의 흐름을 설명하며 예리하면서도 거시적인 분석을 다음과 같이 쏟아냈다. 

"동시대 아트에서 사진은 꽤 중요한 미디어아트예요. 21세기 사진 작품은 포스트모던한 아트웍(artwork)을 생산해 왔는데 아직도 우리나라 미술시장은 회화 중심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사진 미디어에 대한 국내 인식을 전환시키는 것이 필요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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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박영숙, 그녀는 현재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트렁크 갤러리를 운영 중이기도 하다> 


사진이 동시대 아트에서 소외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던 박 작가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사진 미디어 아티스트를 구체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2007년 북촌에 '트렁크 갤러리'를 오픈한 것. 트렁크 갤러리의 역할은 컸다. 미술시장의 혁신을 주도할 갤러리로 성장하며 10년 동안 사진이 중요한 미디어아트임을 확산시키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박 작가는 시스템 안에서 책임 있게 관리돼야 하고 위작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 있는 마더 갤러리가 필요함을 직접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 여성들이 처해왔던 다양한 현실의 명암을 직설적이면서 강렬하게 '미친년'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나타내고 있다. 박 작가는 "남성 중심 자유 체제에서 직관에 따른 지혜를 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여성 안에 있는 마녀성, 여성들의 지혜로운 생각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영숙 작가가 그토록 파고들었던 '미친년'이란 과연 어떤 의미일까? 박 작가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들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닌 여성들이 '미친년' 소리를 들었다"며 "옛날로 치면 허난설헌, 명성황후, 소현세자빈 강 씨, 나혜석 등이 모두 미친년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시대를 가장 진보적으로 산 여성들"이라며 "남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살면 몸이 미치고, 남성이 원하지 않는 대로 살면 미친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즉, 작가가 말하는 미친년은 시대를 앞서가는, 자기주장과 생각을 당당히 말하며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능동적인 여성들을 상징하는 은유적 단어다.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모든 여성은 미친년'이라는 화두로 환원시킨 페미니즘 작업이 사진 속에서 발화(發話) 했고 관객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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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 작가의 [미친년 프로젝트] 작품 중 일부>



그는 1999년 '미친년들'이라는 전시를 시작으로 2005년까지 '갇힌 몸 정처 없는 마음', '오사카와 도쿄의 페미니스트들', '화폐개혁 프로젝트', '헤이리 여신 우마드', '상실된 성', '꽃이 그녀를 흔든다' 등의 '미친년 프로젝트'를 꾸준히 이어나갔다. 이렇게 지속한 '미친년 프로젝트' 9개 전시 전체가 성공을 거두면서 페미니즘에 관해서는 그를 빼고 논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평을 얻은 작가다. 다수의 연쇄 장면으로 구성한 실험적 시퀀스에 여성적 은유를 담은 <마녀> <장미> <우마드> 등 44 작품이 관객들에게 주는 의미는 크다. 특히 슬라이드 작품인 '자궁 스토리'에서 작가는 "가수 한영애의 구음으로 작품의 의미를 더했고 지나치게 편리하고 앞서가려는 모더니스트들의 태도를 비판했다"고 밝혔다. 

작품들을 보면 우리 사회 가부장적 사고의 모순에 대한 작가의 비판적이고 냉철한 시선을 바로 느낄 수 있다. '여성혐오', '성불평등' 같은 여성에게 덧씌워진 사회 현상을 깊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작품들은 그야말로 '센' 기운을 뿜어내지만, 한편으론 슬픔과 한이 묻어 나온다. 아래는 작가의 에세이의 한 대목이다. 

토목업에 종사하셨던 아버지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카메라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교 졸업반 때는 숙명여대 사진 동아리인 '숙미회'를 조직했다. 이후 교수의 추천으로 여성 잡지사의 사진기자가 된 박 씨는 '시와 사진'이라는 코너를 맡았다. 인기투표 1위를 독차지하던 코너였지만 취직한 지 2년 뒤에 그녀는 그만둬야만 했다. 사진부장이 맡았던 표지 사진에 대한 의견을 거침없이 표현해서였다. "자꾸 충돌이 생기니까 나보고 나가래요. 사진부장은 유부남이고, 한 집안의 가장이니까 처녀인 내가 양보하라는 식이었죠." 여러 신문사와 건축 잡지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숙직을 할 수 있겠느냐, 험한 현장 취재를 할 능력이 있느냐, 남자들과 같이 암실 작업을 할 수 있느냐 등의 이유였다. "할 수 있다고 했는데도 계속 떨어뜨리니까 정말 분통이 터졌어요. 여자라는 이유로 짓눌리는 느낌이었죠. 사회 구조가 여성에게 부당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어요." 
-출처: <미/친/년/에/미/치/다> 

박 작가가 페미니즘 사진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1975년 유엔(UN)이 제정한 '세계 여성의 해'를 기념해 열린 '평등, 발전, 평화' 전시에 여성의 현실을 주제로 한 사진을 출품하면서부터다. 이후 40대에 들어선 1981년부터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박 작가는 미술 안에서도 소외됐던 사진을 하고, 그마저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배제된 경험으로 인해 페미니즘에 눈 뜨게 됐다고 했다. 

그는 1992년부터는 민중미술 계열의 페미니스트 단체인 '여성미술연구회'에 가입하여 페미니즘 운동에 앞장섰다. 1997년에는 여성작가협회도 발족했다. 서울 시립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경기도 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한미사진미술관 등 유수의 국내외 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으며, 2002년 광주비엔날레 '멈춤, 지(止), 포즈(PAUSE)'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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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년 프로젝트_ 1999년 / 부분 6>


보도사진 기자로 사진을 시작한 그는 "정신병원에 가서 실제 정신이상 여성들을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찍을 기회가 있었지만, 도덕적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이에 여성적 자아를 누르는 사회 현실을 '미친년'이라는 연출 사진을 통해 풀어보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래서 박영숙의 작품에는 지인인 동료 예술가들이 모델로 자주 등장한다. "미친년 모델 중의 하나였다"고 자신을 소개한 한 작가는 "미친년이라는 말이 해방 같아서 좋았다"며 "언니 세대가 '미친년 시리즈'를 했다면 그다음 세대가 '미치고 싶은 년' '미칠 년' 식으로 이런 작품을 이어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한 김홍희 서울 시립 미술관장은 "1990년대 한국의 페미니즘이 부상하다가 이내 사라져버렸다"며 "박영숙의 작품이 페미니즘을 재생시키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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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 작가의 미친년 프로젝트 작품 일부>


박 작가는 다음 작품으로 '미친놈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다고 했다. 노동자를 위한 의료 활동에 투신한 양길승 녹색병원 원장, 철학자 도올 김용옥 등 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사람들을 사진에 담고 싶다는 것이다. 작가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허유림, 유로저널 컬럼니스트, 인디펜던트 큐레이터, 예술기획 및 교육, Rp’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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