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심원의 사회칼럼

나무야 나무야

by eknews posted Oct 1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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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야 나무야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다. 생각하는 자체가 일이 되기도 하며 그 생각은 역사적 흔적을 남기게 된다. 지금의 문명사회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과거 선진들의 생각한 결과물에서 살아가고 있는 꿈의 도시이기도 하다. 과학문명의 최고 정점을 이룬 현대야 옛사람들의 모습을 글이나 사진으로 남겨져서 후세 사람들에게 전달하지만 그 이전 사람들은 삶의 모습을 벽화에 남겼다. 현실의 상황을 생중계하듯 벽화에 그림을 그려낸 것은 아닐 터이다. 벽화의 대부분은 역사인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그려낸 것이 아니라 후손들이 조상들의 삶을 생각하여 그려낸 것이다. 마치 이집트의 가자 지역에 만들어진 대형 피라미드에 그려진 벽화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새로운 파라오가 즉위하면서 피라미드는 주축 되기 시작한다. 왕이 생존할 때는 외형적인 모습을 만들어 간다. 왕이 죽어서 비로소 구체적인 벽화가 그려진다. 그 벽화의 주인공이 그 무덤의 주인이다. 그가 살았을 때는 볼 수 없는 모습이며, 벽화가 완성되었다는 것은 그의 과거인 역사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각은 위대하다.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으며 동시에 지극히 제한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생각이 세상을 주무를 수 있는 광대함이 있지만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실제적으로 물 한 그릇을 떠올 수는 없다. 불을 끄는 것을 잊고 자리에 누웠을 때 불을 꺼야 한다는 생각을 밤새도록 할지라도 생각 자체로는 불을 끌 수는 없다. 생각은 위대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무디게 여겨지는 몸이 움직일 때 생각은 비로소 완성이 된다. 생각 스스로 존재하지 않고 생각은 언제나 육체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육체의 목숨이 끝나면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육체와 생각은 별개의 것이지만 생각은 마치 육체와 하나 되어 있는 듯하다. 생각과 육체가 분리되어 이중적 삶을 살아갈 때 갈등하게 된다. 갈등은 외부의 환경이 아니라 내부에서 이미 시작되는 것이다. 생각은 하였지만 육체가 그것을 거부하여 움직이지 않을 때 갈등의 씨앗을 발아하여 싹을 틔우게 된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은 가족이나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된다. 도움을 받으면서 고마움을 느끼기보다는 짜증만 늘어간다. 몸이 아픈 사람의 성격은 병이 깊어지고 길어질수록 까칠해진다. 그 이유는 생각은 많지만 그것을 움직일 육체적 능력이 저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과 육체가 분리될 때 인간은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으며 심리적 압박이나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길을 가다 노숙자를 만났다. 노숙자는 보통 술을 마시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라면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작은 돈을 주어봤자 그것으로 술을 사고 마약을 살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생각은 통계에 의해 이미 결정된다. 그런데 그 노숙자는 말쑥이 차려입고 정신이 온전하며 책을 읽고 있었다. 예의 바른 노숙자인 것이다. 개인이 게을러서 노숙자가 된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 그를 거리로 내 몬 것이다. 그의 앞을 지나면서 자신이 생각한 노숙자 상과는 거리가 멀어졌다고 생각할 때 이미 노숙자 앞을 지나치게 된다. 작은 돈을 주고 올 것을 하는 아쉬운 생각이 쉽게 지워지지 않아 두고두고 후회하며 갈등하게 된다. 



생각은 위대한 힘을 발휘하지만 때로는 사회적 편견을 가져오게 한다. 우리 민족은 오랜 시간 동안 지방간의 갈등을 겪어 왔다. 지금에야 해소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정치인들은 지방을 배경 삼아 정치적 원동력을 얻으려 하고 있다. 동서 지방을 갈라놓은 것은 보편적인 민초들의 생각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정치가 빠져 버린다면 지방색은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 경상도 사람과 전라도 사람이 만나서 결혼을 하여 잘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평소에는 싸울 일이 없다가도 선거철만 되면 다툰다는 것이다. 단란한 부부를 싸우게 한 생각은 정치라는 이물질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생각의 차이는 원수가 되게 할 뿐 아니라 동일 민족을 여러 갈레로 쪼갤 수 있게 된다. 한핏줄을 이어받은 형제라도 생각이 다르면 행복할 수 없다. 늘 만나면 싸우게 된다. 싸움의 주제는 큰 것에 있지 않다. 인류의 평화를 위해 싸우지 않는다. 민족의 앞날을 고민하여 싸우지 않는다. 집안의 미래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여 싸우지 않는다. 지극히 단순한 문제로 싸우게 된다. 작은 생각의 차이가 다툼의 시발점이 된다. 



생각은 위대하지만 그것은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우선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자기 보호를 위해선 타인의 약점을 찾아내려는 행동은 인간이 가지는 악함의 근원이다. 그 생각을 그대로 방치해 두면 잡초와 같이 무성하게 자라서 자신이 지배받게 된다. 말끝마다 부정적인 생각을 표출해 낸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다스리는 훈련을 하게 되면 부정적인 것보다는 건설적인 생각을 하게 되어 희망을 말하고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을 하게 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책이 한때 회자되기도 했다. 책은 읽어 보지는 않았을지라도 제목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내면의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칭찬을 할 수 없게 된다. 칭찬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을 정화시키는 훈련을 스스로 했다는 증거가 된다. 



현대 문명은 생각의 결과물이다.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는 생각이 있지만 모든 생각이 그러하지는 않을 것이다. 인류에 크나큰 고통을 안겨준 생각도 있었다. 생각은 나름대로 다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남의 집 담을 넘어 도둑질을 하는 사람의 생각도 자신의 생각이 그르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담을 넘는 것이다. 만약 담을 넘는 것이 나쁜 생각이라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가동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남의 집 담을 넘지 않을 것이다. 생각이 병들었기 때문에 생각의 정도에서 벗어나서 결국은 해로운 행동을 하게 된다. 가끔은 현대 작품이 전시된 화랑을 방문한다. 그곳은 생각의 창고와 같다. 생각의 세계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내 생각이 얼마나 비좁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작품 앞에서는 생각이 혼동을 한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작가를 만나서 작품 내면에 숨겨진 생각을 듣고 싶기도 하다. 작품 곁에 붙여 놓은 대략적인 설명서로는 작가의 생각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테이트 모던(Tate Modern) 중앙 광장에 죽은 나무토막을 이어 거대한 나무를 만들어 놓았다. 학생 무리가 주변에 둘러앉아 전시된 나무를 그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작가의 생각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각이 많은 사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고 둘러앉아 그림을 그리며 생각게 한다. 생각의 시작은 지극히 단순하다. 위대한 발명품을 만든 계기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단순한 생각에 이르기까지 훈련하고 단련되었으며 숙련에 다다랐을 때 단순한 생각이지만 인류 문명의 획을 그을 수 있는 발명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죽은 나무토막들을 연결하여 거대한 나무를 만들 수 있는 생각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나무의 핵심은 생명력에 있다. 가지가 잘라졌을지라도 그 가지를 대신해서 다른 가지를 키워낸다. 심지어는 거대한 태풍에 나무가 뿌리째 뽑혔을지라도 나무는 생명을 잃지 않고 싹을 틔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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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없는 나무, 그 나무 아래서 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그림을 그려낼까? 작가는 무슨 생각으로 죽은 나무를 연결하여 살아 있음의 증명인 나뭇잎이 없는 앙상한 나무를 만들어 냈을까? 어떻게 보면 인간이 형성하고 있는 공동체를 고발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명을 가졌던 흔적은 있다. 나무토막 안에서는 얼마 동안 생명을 유지했다는 나이테가 기록되어 있다. 이제 그 생명의 흔적은 역사의 잔재가 되었다. 생명을 잃게 되면 나무가 아니라 토막이 된다. 그 토막을 연결하여 거대한 나무를 만들었다 할지라도 더 이상의 생명의 기운은 흐르지 않게 된다. 지금 인류가 겪고 있는 고통은 자연재해가 아니다. 사람에 의해 고통을 받는다. 사람 채찍으로 인하여 전 인류가 고민하고 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테러를 자행하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생명의 단절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나무토막이 서로 연결하여 거대한 나무가 되었을지라도 생명이 흐를 수 없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학생들의 생각에 만들어진 나무의 거대함을 보면서 그들 안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존중함을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생각이 너를 살리고, 너의 생각이 나를 살리고,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인류를 살려내는 생명의 전이가 있기를 기대하는 맘으로 나무 앞에 선다.




박심원  유로저널칼럼니스트



- seemwon@gmail.com

- 목사, 시인, 수필가 

- 예수마을커뮤니티교회 담임 

http://jvcc.org

- 박심원 문학세계 

http://seemw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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