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문명지역 문화 예술 산책(5)
지중해 문명권에서 발생하여 세계로 전파된 종교 2
성경의 세계가 보여준 성경의 예술가들
성서를 표현하는 여러 가지 예술 가운에
회화와 조각이 가장 교육적으로 적합하기 때문에 예술 작품을 중심으로 성경을 풀어 나가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일종의 서양에서 종교 예술은 초기
기독교에서부터 오늘 날 까지 성경을 담고 잇는 모든 예술적 표현을 말한다. 성서의 내용이
들어가 있는 예술을 사람들은 신성한 예술이라고 한다. 신성하다는 언어는 예술 작품 주제 자체보다는 그 작품의 감정적이며 정신적인 내용에 적용된다.
신성한 예술이라는 표현보다는 신성한
이야기가 포함된 예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
성서가 말하는 첫 번 째 예술가들은
출애굽기에서 성전을 건설할 때 참여한 예술가들을 살펴 볼 수 있다.
출애굽기35장30절에서 “여호와께서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시고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충만하게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일하게 하시고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기는 일을 하게하고 오홀리압을 감동시키사 가르치게 하시며
조각하는 일과 공교로운 일과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는 베실로 수 놓는 일과 짜는 일과 그 외에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셨다.”
구약 성서 시대에는 화가 조각가 금속 세공 양탄자 만드는 예술가들이
성전을 위하여 작업을 하였다. 중세까지도 음악, 회화 조각,목공,세공,유리공,색유리창 예술,석공,등등의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예술가들과 장인들이 교회의 건축부터 보수 유지까지 그리고 예배의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예루살렘의 성전
현대 교회에는 음악을 전공하는 예술가들만이 교회 안에 남아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예술
유태인들의 경전인 구약성경을
보면 인간적인 관점에서 하느님을 무섭고 분노하고 질투하는 분으로 표현한다. 성경의 인물 설정과 그
성격에는 인간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투사시켜 놓았다
초기 크리스트교의 신자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전파한 신약성경의 예수의 말과 행적을 그의 행동을 모방하고자 한다.
기독교가 박해를 받던 시기에 지하 묘지에서 예배 활동을 행할 때 지하 공동묘지 카타콤베의 벽화 등 원시적인 예술의
형태가 있었다. 하지만 313년 밀라노 공회를 통하여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선포 되자 모든 예술적 행위를 금지하게 된다. 구약의 신명기에 모든 우상을 만드는 것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말씀에 근거해서 동물이나 사람이나 우상이 될 만한 것은 법으로 모두 금지시켰다.
천 년의 새로운 전환기에 이를 때까지 크리스챤들의 예술적인
작품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우상의 문제로 이미지나 형상을 금할 때 특히
회화 보다는 조각이 더 금기 시 되었다.
이슬람에서나 고대 신화의 신들은 3차원의 형태로 만들어져 그림자를
지니고 있었다. 천사들은 그림자가 있는 형상이
있는 집에는 들어 가지 않는다. 유령은 그림자가 없다. 단지 살아 있는 형상이 그림자를 갖는다. 그리고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신들은 3차원의 형상들이었다.
신화에 등장하던, 신전의 숭배
받던 신들이 모두 파괴되고 새로운 종교의 성상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
신약 성서시대
예수의 이야기는 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반 역사학자나, 예수에 대한제자들의 기록을
믿지 않는 학자들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살아 있었고 그리스도교와 신약성경 네 권의 복음서가 증언한 주인공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학자들은 예수가 기원 전 6년에서 4년 사이에 출생한 것으로 의견을 일치하고
있다. 네 권의 복음서는 예수 탄생 후 70년 지나서 구성된다. 마가 복음이 70년경 누가와 마태오가 80-90년 경 그리고 요한 복음은
100 년경에 쓰여 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복음은 서로 공통되는 부분과 서로 다른 부분이 있으며 중요한 것은 예수를 따르는 추종자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메시아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다.
예술가들에게 성서의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는지 하는 의문은 중요하지 않다. 서양의 역사에서 그런 의문은 수 세기에 걸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지식인이든 일반인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 속의 예수와 믿음의 구원자 예수는 같은
사람이었다.
마리아는 신의 아들을 잉태하고 신의 아들은 십자가에서 죽었다. 예술가들이 인간 예수의 머리에 후광을 그려 넣을 때 그들이 이 사람이 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다.
에베소에서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로 정하다
432년 에베소 공회가 열렸다. 신화의 시대가 마감되고 성경의 시대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정서에는 우상
신의 존재가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특히 신들의 어머니로 신을
낳은 여신들, 비너스나 아르테미스 같은 여신들은 다산의 여신, 달의 여신, 사냥의 여신으로 숭배 받는다. 별을 보고 점을 보듯이
아이를 낳으려는 여인이나 임신이 안 되는 여인들은 이 신화 시대의 여신들을 찾았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의 제사장들이 우상의 여신들에게 눈길을 돌리는 여인들을 수수방관할 리 없었다. 교회에서 신자들이 예전의 우상에게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은으로 아르테미스의 모형을 만드는 장인들도 예수를 믿는 자들로 인하여 자신
들이 조각한 작품들이 안 팔리자 걱정하며 모사를 꾸민다. (행전19:24-28)
라파엘로(Raphaël, 의 오를레앙의 마돈나(La Madone
d’Orléans) (샹띠이) 목판에 유화31,7 cm- 23,3 cm 1506-1507년경 꽁데 박물관(Musée Condé) Chantilly,
마침내 에베소에 모인 교회의 지도자들은 중대한 선언을 하였다. “예수는 인간이면서 하나님”이며, 우리의 신을 낳은 어머니가 있으니 “하느님을 낳은 어머니가 성모 마리아”라고 공표한다. 유일신을 낳은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
한 분이면 족하다. 이때부터 전국의 마을 축 제에서 아르테미스나
비너스를 가마에 싣고 행진을 하던 행렬이 성모 마리아를 가마에 싣고 행진을 하게 되었다. 중세부터 르네상스 이후까지 모든 축제 행렬의 선두에는 마리아가 등장한다.
무리요(Bartolomé Estebán Murillo1617 세비야- 1682 Séville) 묵주를 든 마리아(La Vierge au chapelet 1650년 경 캔버스 유화 1,6m-1,2m 루브르 박물관
무리요는 바로크 시대 대가로 “부드러움의 회화”로 널리 알려졌다. 어두운 배경으로 뚜렷하게 부각되는 그의 회화 스타일은 베니스와 플랑드르 회화의 영향을 받은듯하다. 하지만 그의 회화는 보다 유연하고 가볍고 부드러움으로
다가 간다. 어두운 배경으로부터 빛 가운데로 나오며 보다 풍요로운
색조로 퍼져간다.
작품의 마리아는 젊은 세빌라의 여인을 나타낸다. 여인은 복장은 풍성하고 한색과 난색이 교차한다. 흰색과 붉은색의 밝음이 어두운 배경에서 돌출하고 있다. 아이의 사랑스러움과 여인의 주의 깊은 시선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 예수는 흰 천으로 감싸여 있고 드러낸 어깨는 아이의 부드러움을
보여준다. 머리는 어머니의 가슴에 기대고 손에는 어머니의 묵주를
가지고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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