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바람의 기억
1. 놀라지 마라, 삶의 함정은 어디에도 있다
구석 응달에서 둘씩 셋씩 층을 이뤄 목마를 타고 있던 플라스틱 빈 화분들이 움찔움찔 배쓱거리다가 기어이 바닥으로 넘어져 굴렀다. 분리된 화분들이 팽팽한 바람에 휩쓸려 다닥치다 사방으로 흩어졌다. 분에 담겨있던 흙과 스티로폼 조각들이 삭풍에 홀린 눈송이처럼 날았다.
옥탑방 창문을 비스듬히 긋고 지나는 빨랫줄도 거칠게 들놀았다. 그을린 양은대야에 길들여진 속곳의 밴드처럼 속절없이 늘어진 빨랫줄에는 색깔이 바랜 집게들이 서로 볼맞게 몸을 맞대고서 아슬아슬 그네를 탔다. 입을 앙다물고 바람과 추위를 견디며 결코 줄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집게의 모습은, 오직 입으로만 끈을 물고 공중 높이 차오른 어린 소녀의 서커스처럼 위태로워보였다.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고 한 걸음 물러선 정아는 오른편 가스레인지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턱을 갈고리 모양으로 치켜 들통 속을 살폈다. 수면은 아직 잔잔했다. 정아는 찬물 한 바가지를 받아다 들통 속에 붓고는 현관으로 내려서서 출입문 손잡이를 비틀었다. 오래 전부터 문이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처럼 찬바람이 거칠게 밀려들었다. 정아는 재빨리 패딩의 지퍼를 채워 올렸다. 목을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빨랫줄 오른편으로 갔다. 바람에 휘둘려 돌돌 말린 채 불편하게 펄럭이는 벨벳밴드스타킹을 걷어서 패딩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그러고는 바닥에서 제멋대로 구르는 화분들을 하나하나 거두어 바람이 비켜가는 기름 탱크 옆에 층층이 기대 세웠다.
정아는 허리를 펴고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솟구친 포말이 는개처럼 흩날려 해안을 적셨다. 그것들의 희디흰 입자는 천일염의 환영처럼 벼랑 위를 부유하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바다에서 내달려온 바람의 기세는 더욱 등등했고 바람에 업힌 먹구름의 이동 속도는 더 빨라졌다. 하늘은 옥탑방 꼭대기에서 만져질 만큼 낮아졌다.
안으로 들어와 들통부터 살폈다. 여러 개의 동심원이 교집합 모양으로 복잡하게 섞이기 시작했다. 정아는 레인지의 스위치를 오프로 돌리고 들통의 귀를 두 손으로 잡아 바닥으로 내렸다. 손잡이를 고쳐 잡고 왼편 욕실로 갔다. 세면대 꼭지에다 연결한 호스를 들통에 넣고 냉수를 틀었다. 오른손 검지를 수직으로 꽂아 물의 온도를 가늠했다.
패딩과 청바지를 벗어 열린 세탁기 턱에 걸쳤다. 허벅지에 금세 소름이 돋았다. 정아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팬티를 내려 허벅지에 걸고 라이너를 살폈다. 미간이 좁혀졌다. 문득 어젯밤 영미가 콘돔을 손에 쥐어주며 당부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고바야시는 이거 싫어해. 그래도 가서 미친 척 씌워봐. 혹시 모르잖아, 교양 있는 네 말은 들을지. 정아는 젖은 라이너를 떼어내 접고 접어서 쓰레기가 든 비닐봉지 속 깊이 쑤셔 넣었다. 고바야시의 팽창한 페니스가 떠올랐다. 삽입의 순간을 감지한 정아가 머리맡에 둔 콘돔을 찾아 손을 뻗는 사이 고바야시는 위협을 감지한 낙지처럼 순식간에 정아의 몸을 비집고 들어왔었다.
정아는 팬티를 세탁기 안에 던져 넣고 쪼그려 앉았다. 바닥에 얼음을 두고 있는 것처럼 발이 시렸다. 스웨터 밑단을 말아 위로 당겨서 입에 물고 다리를 넓게 벌렸다. 요의가 느껴졌다. 수채를 겨냥해 자리를 옆으로 조금 옮겼다. 수채에서 올라온 하수 냄새가 역했다. 요도를 느슨하게 풀자 양 발에 따뜻한 물방울이 튀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잠시 잠잠했던 바람이 다시 또 몰려와 창문과 출입문을 붙잡고 요동을 쳤다.
정아는 바가지로 물을 퍼서 다리 사이에 끼얹었다. 따뜻한 기운이 골과 골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손바닥으로 물을 걷어 올리듯 모아 서둘러 비누칠을 시작했다. 구석구석 손끝을 넣어 거품을 만들었다. 뒷물을 하다보면 간혹 손끝이 거품을 따라 안으로 매끄럽게 빨려드는 때가 있다. 제 손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야릇한 느낌이 필요 이상으로 밀려드는 경우가. 하지만 오늘은 충분히 거품을 내고 있는데도 별다른 느낌이 없다.
하체에서 상체로 전이된 찬 기운으로 인해 어금니의 불화가 시작되자 정아는 서둘러 몸의 물기를 제거하고 욕실을 나와 방으로 들어갔다. 보일러의 불기운을 맛본 지 오래인 방은 욕실과 다를 바 없는 냉기로 가득했다. 정아는 레깅스 위에 두터운 트레이닝복을 껴입고 목도리까지 둘렀지만 한기는 쉬 잡히지 않았다.
방안은 늘 그렇듯 은지의 흔적으로 어지러웠다. 펼쳐서 눌리거나 찢어진 여러 권의 동화책이며, 얼굴이 찌그러지거나 눈, 코, 입이 제멋대로 생긴 공주가 득실거리는 스케치북, 공주를 탄생시키고 쓰러진 크레파스며 색연필들, 팔 하나가 덜렁거리는 인형, 그 인형이 보는 손거울과 화장대, 소꿉놀이에 쓰인 취사도구와 식기들, 지름이 작은 훌라후프, 먹다가 흘리거나 남긴 과자부스러기들. 정아는 널린 은지의 살림살이를 한쪽 구석에다 두서없이 밀어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호텔을 나설 때부터 시작된 두통 기운이 점점 또렷해졌다. 정아는 화장대 서랍을 뒤적거려 두통약을 찾아내 입에 넣고 물병이 어디 있나 둘러보았다. 쓰러져있는 생수병에 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정아는 침을 모아 약을 넘겼다.
정아는 침대 이불속에 잠시 발을 넣었다가 그대로 누워 턱까지 이불을 당겼다. 엄마를 기다리고 있을 은지를 생각하면 당장 일어나 영미 집으로 가야 했으나 도무지 몸이 움직여주지 않았다.
정아는 올려둔 전기장판의 온도를 두 단계 더 올렸다. 등에서 출발한 온기가 척추를 따라 오르내리다가 서서히 주변을 넓혀갔다. 갑작스런 온기에 긴장이 풀린 탓일까, 급속하게 나른해졌다. 눈이 절로 스르르 감겼다.
정아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냥 단순한 꿈이 아니라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제 이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다음호에 계속)
작가의 말
-장편소설 연재를 시작하며...
이 소설이 성을 팔아 삶을 꾸리는 사람들의 단순한 인생사가 아니기를 소망하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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