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장소와 시간, 자아가 없는 우리
"국가는 누군가의 희생과 누군가의 봉사로 돌아가는
거야. 박재호는 희생을 했고 나는
봉사를 했어. 근데 넌 뭘 했냐?"
사건을 조작하려 했던 검사 홍재덕이 결국 옷을 벗고, 유명한 로펌(광평)의 변호사가 된 후 윤진원과
마주친 장면에서 건 낸 말. 2015년 개봉했던, 윤계상과 유해진 주연의 [소수의견]이라는 영화 마지막 대사이다. 지방대 출신의 국선변호사였던 윤진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홍재덕이 건넨 명함을 던지는 것으로 그의 대답을 대신한다. 그리고 이제 그 질문은 관객들에게로 향하여 대답은 다음과 같이 물으며 우리의
몫이 되었다. "근데 난 뭘 했나?"
한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재임기간 중 오바마를 당혹시켰던, 그리고 미국 전역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던 사우스캐롤라이나 흑인교회 총기난사사건. 갓 20을 넘긴 어린 범죄자의 방안에는 1980년대 남아프리카 지역 넬슨만델라의
민주화 운동 사진으로 가득했었다. 과연 이게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당시 남아프리카지역은 백인우월주의지역이었다. 이런 평화로운 곳에 자신들의 자유를 외치며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는 만델라를
보며 영국의 마가렛대처는 그를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하였으니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편파적이며 왜곡적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리고 슬픔에 잠긴 이 도시를
방문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 도중 예정에 없던 [Amazing
Grace]를 부르며 국민들의 상처 난 마음을 보듬었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대사를
곱씹으며, 오바마의 Amazing Grace를 들으며 필자는 어떤 분노나
연민이전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Wrong place and wrong time]
미국범죄자의 세상은 현재가 아닌 1980년대의 세상이었고, 영화 속 홍검사는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는 전형적인 플라톤주의자로서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하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과연 잘못된 것일까? 잘못된 것이라면 과연 어디에 속하여, 무엇을 보고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탈이데올로기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각양각색의 사고를 가지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과거 한 시대가 100년에서 200년간 지속되어 하나의 사조로
설명될 수 있었던 것과는 다르게 모더니즘에서 포스트 모더니즘까지 4-50년이 걸렸고 구조주의를 거쳐
탈구조주의까지 20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으니, 점점 빨라지고 짧아지는 것이다. 지금은 10년 단위로 바뀌는 세상에서
어떤 것이 주류인지 확인하는 방법 또한 마땅치 않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지금 현재는 모든 가치가 같이 공존하고 총체적으로 들어가있는 세계로서 내가 어떤 시대를
살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래를 살 것 인가. 과거에 복귀하여 안정적인 삶으로 세상을 관조할 것인가 하는 것이 전부 개인의
선택이고 이는 고스란히 결과물로서 이어진다는 것. 미술사에서 라파엘전파는 과거를
선택하였고 윌리엄 모리스는 노동의 가치를 선택하여 산업화를 거부했다. 자연에서 찾은 소재로 수공예운동을
펼친 그와는 다르게 아르테코는 미래지향적으로 사람들이 창조하는 새로운 선이 있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매트릭스라는 가상세계에서, 장자의 호접몽에서, 수많은 공간 속에서, 그리고 자신들의 꿈속에서 사람들은 다들 허우적거리고 있지만 이는 한편으로
현실을 직시하여 땅바닥에 두 발을 디디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비록 내가 살고 있는 시대를 선택하여 그 안으로 들어가는 의지 또한 자유이며
이것에 대한 가치 판단 또한 자신의 몫이나 세상은 이를 공평하게 평가해 주지 않는다는 것.
[자아가 없는 공동체]
흔히들 서양의 개인주의에 대하여 사람들은 ‘이기적’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국어사전의 의미로 [자신의 이익만챙기는 것]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과연 그럴까?
사람들은 미술작품 하나에도 개인의 가치부여하고, 옷을 입을 때에도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입는다. 즉 내 안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함인데, 이러한 나의 가치 실현이 개인주의인
것 이다. 그러나 이를 ‘이기적’으로 보는 것은 동질성을 추구하는
문화가 서로 다름을 배척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내 안에 세계가 있고 각각의
가치가 실현되는 세계주의를 바로 눈 앞에 두고서도 서로 어깨동무 하며 하나의 가치만이 정답인양 살아가는 것이 과연 좋은 것인가. 그래서 한국의 공동체에는 주체가 결여된 공동체로 내가 없다.
라깡은 타인은 자아를 비추는 거울이고 자아는 타인을 통해서 볼 수 있다라고 말하고 칼융은 개성화 과정을 통해
타인 속에서 내가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이러한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 버리니 누가 주체이고 객체인지 아무도 모르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
예술도 처음에는 흉내를 내며 모방으로서 출발한다. 수많은 이야기를 몰고 다니는 고흐에게 밀레, 피사로, 고갱이 없었다면 과연 그의 개성화 과정을 이루어졌을까? 앞의 세 사람이 고흐에게 매개체가 되어 그의 독특한 화풍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현대예술이라는 것 또한 매개물이자
중간을 연결해주는 도구이다. 현대인들은 비록 미디어를 언어
관념상 언론이라고 생각하지만 미술자체가 미디어 인 것이다. 다음은 미술의 분화가 발생한
하나의 장면이다.
전쟁이 끝나고 난 후 군수품 공장들이 가전제품을 만들어내며 여성들의 가사노동을 해방시킨다. 지금은 평범하게 여겨지는 여성의 삶이 당시 노예40명을 거두는 것과 같다고 하니
얼마나 획기적인 일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니 앤디워홀로 대표되는
팝아트는 1950년대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이
아닌 가전제품의 폭발적 증가로 인한 소비자주의가 형성되면서 꼭 나와야 했던 필연주의였던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예술이다. 갤러리에 걸려있는 것만이 예술이 아니다]라는 현상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 또한 당시 사춘기라는 개념조차
없었을 때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딘이 등장하면서 세대를
분화시킨다. 즉 대중이 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세대가 분화되고 이는 1968년 페미니즘 등장하면서 내가
누구인가, 여자의 길이 따로 있지 않는가
라는 물음들을 던지게 된다.
과거에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대중이 가질 수 없었다. 사회가 시스템화되면서 자신이 군주나 종교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과거에는 한 가지 주의, 사조만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의 전야부터 1950년대가 되면서 여러 개가 폭발함과
동시에 모든 이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고 자기욕망을 찾아서 자기 욕망을 구현한다. 철학이 개인에게 옮겨오면서 누구나 다 예술을 하며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을
해석하는 주체가 스스로의 몸이 되는 것이다. 한가지만을 고집하고 이와는
다른 것을 배척하는 한국과는 다르게 미국에서는 미니멀리즘. 네오다다. 해프닝. 팝아트가 공존하며 다 인정받는 다원화, 다문화시대에 들어섰던 것이다. 이태리는 어떤가? ‘아르테 포베라’라는 이름으로 버려진 재료, 누구도 돌보지 않는 것으로 미술을 시작한다. 미술 속에 내가 들어가는 과정미술로서 어떠한 것이 어떠한 미로 나올지 모르는, 자연이 아름다운 것은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라는, 어떠한 고정된 관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환기된 관념으로서 미술을 보았던 것.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가치
속에서 현대인들은 어떤 개념으로 자신들의 세계를 어우르는 공동체를 찾아가는 것일까? 지식을 배운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앎을 배열하는 행위이자, 자신의 삶을 배열하는 행위이지만 우리는 과연 이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는
것일까?
모든 음악이 끝나는 시간 4분 33초. 존케이지는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려주지
않은 채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관객을 모독하는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똑같은 음악을 듣고 있어도 그 안에서 건져내는 것은 다 다름은 음악의 본질. 결국 존케이지는 관객들에게 ‘네 안의 네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를 주문한 것이다. 그러나 Blackout 정전과정을 거쳐야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그 과정에 들어가기를 힘들어한다. 자신의 소리를, 자신의 눈을 타인에게 위탁하는 행위.
어떠한가? 이렇게 세상은 다양하게 혼란
아닌 혼돈 속을 헤메이고 단단한 밧줄을 찾고자 혈안이 되어있는데 여전히 스스로가, 그리고 자아가 빠진 집단만이
공동체라며 정답인 것 마냥 우리들만의 잔치를 즐겨야 하는 것일까?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