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5)
바람의 기억
1. 놀라지 마라, 삶의 함정은 어디에도 있다
“고바야시는 시간이 아무리 없어도 세 번은 꼭 채우니까 일찍 호텔로 가서 여유 있게 대처해. 그리고 콘돔 싫어하니까 그거 억지로 씌우려다 싸대기 맞지 말고.”
기싸마는 대꾸 없이 검지로 테이블 위의 담배를 가리켰다. 영미가 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기싸마는 담배를 받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웠다. 손가락이 담배와 구별이 쉽지 않을 만큼 희고 가늘었다.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래? 하품하다 새똥 맞은 것처럼?”
기싸마의 표정을 살피며 영미가 물었다. 기싸마는 볼이 홀쭉해지도록 연기를 깊이 삼켰다가 길게 내뿜었다. 미처 입술 사이로 빠져 나오지 못한 연기가 오뚝한 콧날 아래로 풀풀 새났다.
“가시나 참 맛나게도 먹는다. 좀 있으면 똥꼬로도 연기가 나오겠네.”
정아는 터지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냈다. 영미의 농에도 기싸마는 심드렁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아는 기싸마의 엉덩이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영미가 단단하게 잘 익은 밤톨이라면 기싸마는 음지에서 여름과 가을을 보낸 창백한 도토리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 진짜 자존심 상해!”
손으로 관자노리를 누르며 얼굴을 찌푸리던 기싸마가 갑자기 짜증 섞인 어조로 말했다. 정아는 아까 영미가 이야기한 클레임 건을 기싸마가 혹시 저편에서 들은 것은 아닌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영미도 정아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꿔서 다독이듯 물었다.
“왜 그래? 네 자존심이 무슨 횟감이라도 되냐, 상하게?”
“그래, 네 말 맞다. 지금 내 신세가 영락없는 광어다. 맛이 간 광어.”
기싸마가 귀 밑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손등으로 쳐서 뒤로 넘기며 재게 말을 받았다.
“지랄.”
영미가 눈을 흘겼다. 정아는 테이블의 재떨이를 기싸마에게 건넸다.
“가봐. 고바야시가 일편단심 너만 찾는다.”
기싸마가 재떨이에 재를 떨며 담담하게 말했다.
“나를?”
영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나 퇴짜 맞았어.”
“뭔 소리야? 고바야시에게 그 얘기 안했어? 나 오늘부터 마법의 성이라는 거?”
“왜 안 했겠어. 혹시 이해를 못해서 그런가 싶어 실감나게 설명했지. 아주 그게 터진 수돗물처럼 펑펑 솟고 있어서 당신 피투성이 될까봐 내가 대신 나왔노라고.”
기싸마는 자신의 둔부를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그런데도 나를 원한다는 거야?”
기싸마가 다시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 이놈의 인기를 어쩌면 좋아!”
영미가 건너편 창가를 힐끗 살피며 말했다. 정아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고바야시는 휴대폰을 귀에 대고 손짓을 해가며 뭔가를 복잡하게 설명하는 중이었다.
“아무튼 네가 해결해. 난 이미 택시 불렀으니까 오면 갈 거야.”
기싸마가 얼굴을 모로 틀어서 진입로 쪽을 내다보며 말했다. 가시나, 떡을 입에 넣어줘도 못 먹네. 영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곧 경적이 울렸고 기싸마가 이편과 저편 창가에 번갈아 손을 흔들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바람에 날리는 생머리 때문일까, 기싸마는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훨씬 명랑하고 앳돼 보였다.
영미가 건너편 고바야시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가자 정아는 포트에 남은 물을 잔에 따라 입을 축였다. 테이블 위의 메뉴판을 앞으로 당겨 보이차의 가격을 확인했다. 무슨 찻값이 이리 비싸담, 정아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백에서 손지갑을 꺼냈다. 지갑을 열자 날을 세운 지폐 한 장과 동전 몇 개가 한눈에 들어왔다. 정아는 지폐로 두 사람의 찻값을 치르고 나면 얼마가 남는지를 암산했다. 절로 한숨이 났다. 버스비를 제하면 은지의 약도 겨우 하루분 정도나 구입할 수 있을 터였다. 정아는 조금 전 택시를 부르려고 했던 마음이 얼마나 부질없는 욕심인지 명료하게 느껴져 서글펐다. 출입문 위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나가는 버스를 타려면 20분 후에는 일어서야 할 것 같았다. 지갑을 백에 넣고 휴대폰을 꺼냈다. 창을 열자 미친개가 보낸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경고 사인처럼 깜빡거렸다. 매일 반복되는 비슷한 독촉과 욕설,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문자라서 부러 열지 않았다. 정아는 영미에게 먼저 가겠다는 문자를 보내고 휴대폰을 닫았다.
정아는 세운 무릎을 양팔로 껴안고 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은 여전히 거셌고 난폭했다. 해안가의 키를 가진 모든 것들이 행여 뿌리를 놓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눈길을 멀리 바다로 보냈다. 바다는 사정이 더 나빠 보였다. 바람의 채찍에 쫓겨 수평선에서부터 도움닫기를 시작한 파도는 쉬지 않고 뭍을 향해 내달렸다. 그러다 마침내 광활한 바다에도 끝이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해안의 현무암에 몸을 찢거나 모래밭에 지친 몸을 하얗게 펼쳐 고단한 생을 마감하곤 했다. 정아는 문득 ‘바다가 푸르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적은 어느 노작가의 글귀를 떠올렸다. 그의 진단처럼 지금의 바다는 전혀 푸르지가 않았다. 넓게 보면 회색처럼 보였으나 조금만 시야를 좁히면 금세 은회색이나 엷은 카키색으로 바뀌곤 했다. 먼 바다와 가까운 바다의 색깔이 달랐고, 파도의 마루와 골도 저마다의 독특한 색감을 드러내며 일렁였다.
정아는 불현듯 저 거칠고 변화무쌍한 바다를 무사히 건널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바다가 잠잠해진 이른 새벽 은밀하게 부두로 나가 위험을 감지한 갯강구처럼 재빨리 배에 오르면 어떨까. 삼등실 구석에 등을 기대고 한나절 정도만 흔들리면 기차가 있는 항구에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기차에 올라 다시 한나절을 달린다. 그다음 버스로 갈아타 굽이굽이 반나절을 달려가면 낯익은 풍경들이 기적처럼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렇지만 배는 위험하다. 배가 배라서 위험한 게 아니라 배가 닫는 곳이 항구라서 위험하다. 미친개가 그러지 않았는가. 도망 가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고. 항에 도착하면 그새 연락을 받은 미친개 형제들이 저편에서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할 게 뻔하다. 그러므로 바다는 비행기로 건너는 게 안전하다. 공항은 언제고 사람들로 북적거려서 번뜩이는 눈을 피하기가 용이하고 일단 비행기에 오르면 미친개가 손을 쓰기도 전에 빠르고 자유롭게 날아올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비행기 편수는 늘 많아서 좋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꼬리를 물고 날아오르니 어느 때 공항으로 나가도 상관이 없다. 아, 그런데 거기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지금 지갑에는 비행기 표는커녕 집으로 갈 택시비조차도 없는 것이다.
“웃기는 짬뽕이네!”
정아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돌아온 영미의 표정이 묘했다.
“뭐가?”
정아 곁에 털썩 주저앉은 영미는 점원아가씨를 향해 포트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아가씨가 물병을 가져와 포트에 물을 보충해주었다.
“참나, 꼴에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정아가 무슨 일이냐고 재차 물었다. 영미는 건너편 창가를 살피며 주저하다 정아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