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8)
바람의 기억
2. 눈 속의 저 붉은 동백꽃
“저도 그 뉴스 봤어요.”
영미가 룸미러를 바라보며 맥없이 대답했다. 이른 아침, 퇴근길에 골목 슈퍼의 계산대 너머로 보았던 텔레비전 화면이 떠올랐다. 기자는 무너져 내린 터널 같은 작은 공간들을 차례로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마치 불이 꺼진 숯가마처럼 검게 타버려서 이곳이 아가씨들의 방이라는 기자의 멘트가 없었다면 저게 사람이 기거하던 공간이 맞는가 싶도록 처참했다. 화면은 다시 놀란 아가씨들이 불길을 피해 달렸다는 복도를 지나 곧 가파른 계단 앞에서 정지했다. 기자가 계단 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곳이 바로 화마에 쫓긴 아가씨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살려달라고 외치며 두드렸던 철문입니다.
“참 기가 막혀요. 감방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짐승처럼 갇혀 살다가 생을 마감한 그 아까운 청춘들...”
기사는 말끝을 흐리며 혀를 찼다.
영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둠에 휩싸인 도로변 풍경이 저마다의 사연을 드러내며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가 밀려갔다. 궂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어둠 속에서 오히려 조금씩 깨나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에 빛나는 거리와 불을 밝힌 상가는 밤이 되어야 비로소 활기를 띄기 시작하는 이 도시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창유리에 낯이 익은 얼굴 하나가 나타나 영미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영미는 외면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둠 속 저만치 계단에서 서로 부둥켜 앉은 채 누워있던 주검들이 고개를 스윽 돌려 이편을 노려보았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창문이 없는 숙소가 떠올랐다. 전에 영미를 감금했던 업소에도 좁은 복도가 있었고 가파른 계단이 있었으며 자물쇠가 채워진 철문이 있었다. 그 악몽의 시간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자꾸만 떠올라 영미의 뇌리를 아프게 긋고 사라졌다. 문득 눈에 핏발이 선 영남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영남이가 점퍼 안에 숨겨 온 사시미 칼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누나, 걱정 마! 내가 구해줄게!
영남이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 삶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그랬다면 나는 아마 지금도 그 습하고 어두운 숙소의 창백한 불빛 아래서 하의를 벗은 채 머리칼의 숫자나 헤아리며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영미는 코끝이 시큰해졌다. 영남이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못난 누나를 위해 자신의 미래를 버린 가여운 동생. 영미는 고개를 숙여 손등으로 눈가를 스윽 훔쳐냈다.
기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다행인 게, 이곳 윤락업소들은 그래도 육지처럼 가두고 영업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물론 어떻게든 감시는 하겠지만. 아무튼 이번 화재 여파가 간단치 않을 것 같아요. 여러 가지 형태로”
“그러잖아도 벌써 소방관들 유흥업소 돌면서 비상구 점검하고 다니는 것 같더라고요.”
영미는 말을 해놓고 아차 했다. 기사가 혹시 업소에 나가느냐고 물으면 어쩌나 싶었다.
“이번 화재를 미시적으로 보면 우리 지역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울 가능성이 큽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요, 이제 그런 비극을 근본적으로 막자 해서 정치권에서 성매매특별법을 만든다고 하거든요. 성매매를 못하게 법으로 정하는 거죠. 물론 현재도 성매매를 금지하는 법이 있긴 해요. 근데 그게 사문화된 법이거든요. 어쨌거나 국회에서 강력한 성매매특별법을 만든다고 하니까 일단 환영은 합니다만, 만약 실제로 그게 통과가 되어서 시행되면 나타날 부작용도 만만치가 않아서 걱정입니다. 우리나라 여성 단체에서 주장하는 성매매종사자 수가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까, 단순하게 생각하면 100만 명의 실업자가 생기는 거거든요. 이 사람들이 당장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우리 지역으로 한정해서 생각해도 법이 시행되면 이 섬에 널린 유흥업소와 숙박업소들은 죄다 타격을 받을 겁니다. 특히나 일본인을 상대로 영업하는 우림각이나 송림각 같은 곳은 편법 영업도 불가능해서 문을 닫을 수밖에 없어요. 저는 법 취지는 찬성하지만 우리 지역 경제에 미칠 악 영향은 대단히 우려하는 사람입니다.”
영미는 맞은 말씀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기사가 방금 한 이야기를 어제 미팅 시간에 마담언니도 했었다. 앞으로 송림각의 운명은 관련 법 제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니 다들 정신 바짝 차려야 하며 국회에 로비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자 뒤늦게 들어와 분위기 파악을 못한 순미가 손을 번쩍 들고 의견을 말했다. 그럼 우리가 단체로 비행기를 타고 국회로 가서 한 번씩 근사하게 주고 오지요. 우리 송림각의 조개 맛을 보여주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잖아요! 순간 모든 시선이 순미에게 쏠렸다. 순미를 쏘아보던 마담언니가 혀를 굴려 입술에 침을 발랐다. 그건 마담언니가 누군가를 닦달할 때 보이는 준비자세여서 다들 긴장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담언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저년 세탁실로 데려가라! 가서 재봉틀로 저년의 모든 입에 지퍼를 달아줘. 생각 같아서는 아주 오바록을 치고 싶다만 처먹고 소변은 봐야하니까 봐준다. 순미는 재봉틀에 박히는 신세는 면했지만 대신 어제 오늘 세탁실 청소를 해야 했다.
차가 부드럽게 속도를 줄여 멈춰 섰다. 영미는 거스름돈을 준비하는 기사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영미는 부자마트와 어깨를 겯고 나란히 늘어선 횟집들을 지나 오른편으로 꺾었다. 부자마트 바로 뒤 블럭에 정아의 옥탑방이 있었지만 중간에 무질러 갈 방법이 없어 한사코 디귿자를 그리며 돌아야했다.
영미는 복도 등 스위치를 올려가며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4층 계단참에서 잠깐 숨을 돌렸다가 옥상으로 나가는 문을 밀었다. 잠잠했던 계단과는 달리 옥상은 다시 바람의 세상이었다. 영미는 재빨리 옥탑방 출입문을 당겼다. 문이 열리지 않자 손으로 두드리며 은지야, 하고 불렀다. 반응이 없자 영미는 옆으로 돌아가 창문에 대고 코알라이모가 왔다고 소리쳤다. 그제야 작은 그림자 하나가 안에서 통통거리며 부산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문이 열렸고 영미 품으로 은지가 뛰어들었다. 영미는 손바닥으로 은지의 이마를 만졌다. 미열이 있었지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은지가 문 쪽을 살피며 엄마를 찾는 모양새로 두리번거렸다.
“엄마는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이모가 먼저 왔어. 우리 은지 주려고 피자 사왔지.”
영미는 피자박스를 은지에게 건네주고 조심스럽게 부츠를 벗었다. 은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간 영미는 까치발로 방안을 성큼성큼 돌았다.
“아유, 발 시려! 집이 왜 이리 추운 거니?”
이모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는지 은지가 침대에서 까르르 웃었다. 영미는 정아의 덧신을 발견하고는 얼른 신은 다음 문 옆 보일러 타이머를 들여다보았다. 은지가 이불 속에 발을 넣으며 그거 고장 났다고 말했다. 영미는 침대에 걸터앉아 이불 위에 신문지를 펴고 포장을 풀었다. 피자는 다시 데우지 않아도 될 만큼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영미는 부엌으로 가서 접시 두 개와 잔 하나를 가져왔다.
“자, 피자 맛있게 먹고 얼른 감기 보내버리자.”
한 조각을 접시에 올려서 은지에게 주며 영미가 말했다. 영미는 은지가 피자를 한 입 가득 물고 오물거리는 것을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고개를 돌려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안은 은지가 벌려놓은 장간감에다 여기저기 늘어놓은 옷가지며 가재도구들로 어지러웠다. 정아의 깔끔한 성격상 이렇게 너저분하게 놔둘 리가 없는데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