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코윈 회원들, Reigate Hill 산행을 다녀와서
새벽엔 안개가 자욱해서
오늘의 산행이 걱정이 되었지만 리치몬드 공원에 들어서자 신선한 바람과 햇살이 온 사방에 가득해 마음을 놓는다.
평상시에 잘 건너 뛰던
아침을 산행 나선다고 그것도 영국식으로 거나하게 먹다가 시간이 지체되어 부랴부랴 기다리고 있는 가희를 향해 달려간다.
쌈박하지 않은 자신의 거동을 미심쩍어 하면서 약속 지점에 도착하니 앞서 출발한 정아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흠—예상대로 차가 산으로 올라갔구나,
생각만 해도 재미 있어서
옥희와 나는 자꾸만 웃었다.
그리고 미리 와 있던 화회탈
같은 미소의 선희가 건내주는 커피를 마시며 꽤 기다렸다.
얼마나 높이 올라 갔다 왔는지, 뜨거운 콧김을 뿜어내는 차에서 내리는 그들은 그물에서 놓여나는 물고기 처럼, 바깥 공기를 마시며 생기를 찾자 말자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해 버렸고 천성이 조용할 것 같은 영국인들은 곁눈질로 목청 낭랑하고 행동에 전혀 거침이 없는 우리네를, 외면을 가장한 극도의 호기심과 침묵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던지 말던지 화장실, 물, 언니, 추워 등의 한국 말이 높은 하늘로 마구 날아 다녔고 벙거지 모자에 목도리, 도데체 몇겹을 껴 입었는지 얼굴이 조막 만해진 연화가 펭귄같은 걸음으로 걸어 왔을 때 너무 우스워 하늘을 노려 보야야 했다.
산행의 길은 완만했고 우리의 발걸음은 경쾌했다.
나란히 걷던 구찌 중절모의 연예인과 청산에 물 흘러 가듯 허허로이 걷다가 경로를 벗어나서 허급지급 돌아 왔는데 숨도 고르기 전에, 붉은 모자의 교관을 연상시키는 은주의 목소리가
“이 언덕을 넘어 지름길로 갑니다”
라고 했다.
이게 날벼락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90도의
(내 눈에는 분명 직각으로
보였다) 경사진 이 비탈을 올라 가다니, 돌아서 가…지.. 하는 사이
젊은 코윈들은 앞만 보고
돌진하는 무소들 처럼 철책으로 막혀있는 문을 뛰어 넘고 있었다.
요즘와서 부쩍 자신의 체력에
자신이 없던 나는 “다리도 짧은데…” 하는 정아의 목소리를 꿈결처럼 들으며 비탈을 오르기 시작했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상황이
어처구니 없이 오늘 이런 모습으로 찾아 오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던져 버리고 싶도록 걸리적
거리던 외투를 받아 주던 착한 선희가 아니었으면
4 발로 기어 가지도 못 할
뻔 했다.
구찌 모자와 붉은 자켓의 영지는 긴 다리로 사슴처럼 깡총거리며 가볍게 올라가 버렸고 숭고한 순례자의 무리처럼 말 없이 고행의 길을 오르고 있는 옥희와 연화, 가희 그리고 뒤에서 조용히 전우들의 뒤를 바쳐주며 오고있는 정아, 물만난 고기처럼 카메라를 들고 4발로 기어가고 있는 나의 엉덩이를 신이 나서 찍어대고 있는 개구진 은주, 모두 젊었고 혈기가 넘쳤다.
땅에서 얼굴을 때지 못하고
거북이처럼 기어 올라 가던 나는 정상의 끝에서 또 하나의 까마득한 태산같은 두번째의 절벽을 바라보자 숨이 턱 하고 막히는데 정말 슬쩍 뒤돌아 본
계곡의 맡바닥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2차 대전 때 독일군으로 부터 영국을 사수하던 공군 기지의 흔적과 그
당시의 처참했던 현실이, 남아있는 건물의 잔재와 땅 속 벙커로 부터 전해져 오고, 백악층의 부드러운 석회질 암석들이 파편처럼 쪼개져서 흩어져 있는 들판 위로 정체를 알수 없는 뼈 한덩이를 바라보는 나의
귓전에 역사의 흥망성쇠가 함성처럼 밀려왔다.
말에게 물을 주기 위해
만들었다는 우물정자의 12개 돌기둥 사이로 긴 영겁의 세월 속에 찰라 기억의 무늬를 짜놓듯
사랑스런 코윈들의 모습을 여신처럼 새기고 돌아오는 길에,
이름 모를 영웅들의 가호를
받았는지 승리하고 돌아오는용사들 처럼 그들의 발걸음에 힘이 넘친다.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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