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14)
바람의 기억
2. 눈 속의 저 붉은 동백꽃
“낮에 내가 지물포 들러서 비닐 사가라는 말 섭섭하게 들었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그거 진심으로 한 거다. 손님이 거부하면 모르지만 원한다면 기꺼이 나가서 고맙습니다 하고 정성껏 모셔야 돼. 그게 프로지. 요즘 우리 애들은 뭔가 중요한 게 빠져있어. 도무지 절실하지가 않아. 오늘 하루만 살고 말 것처럼 행동하지. 이 바닥까지 왔으면 악바리가 되어야 해. 그렇게 나태해서 언제 이 바닥에서 벗어날 수 있겠니. 하긴 요즘 애들은 지 누워있는 자리가 시궁창인 줄도 몰라. 심지어 기생 관광이라는 말에 지가 무슨 황진이라도 되는 줄 알고 나대거든.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으니 밤에 개고생해서 번 돈을 다음 날이면 엉뚱한 데다 뿌리고 다니지. 아마 우리 영미도 한 때 호스트바 들락거리며 요란했지?”
장 마담의 지적에 영미가 움찔했다. 경철이 재게 끼어들었다.
“아주 적절한 지적이십니다. 그때 어찌나 열렬했는지 열녀 하나 난 줄 알았어요.
영미가 힐끗 경철을 째렸다가 고개를 숙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실이어서 영미는 잠자코 술을 따라 들이켰다.
“그나저나 샤넬 그 자식 요즘은 외제차 탄다고 하더라. 어느 중소기업 사모를 스폰서로 물었다고 해. 그럼 우리 영미가 사 준 차는 어디로 간 거야.”
영미도 그 소식은 알고 있었다.
“샤넬? 그놈 작명 실력은 형편없어도 여자 후리는 재주는 출중한 모양이구나. 하긴 우리 영미가 익사 직전까지 허우적거렸으니 그것만으로도 실력은 충분히 입증된 셈이지.”
영미에게 샤넬은 유명 상표의 의미가 아니었다. 굳이 설명하자면 영미가 자신의 기억에서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지우고 싶은 이름 중 하나였다.
룸싸롱에서 우림각으로 옮기고 난 후 건강도 좋아지고 수입도 쏠쏠해서 좀 여유가 생길 무렵, 그저 스트레스나 해소하자는 동료를 따라 우연히 발을 들인 호스트바, 거긴 신세계였다. 예쁜 여자는 술집에 있고 똑똑한 남자는 교도소에 있다는 말이 있는데, 거기에 하나를 더한다면 도시의 꽃미남은 죄다 호스트바에 있다고 주장해도 무리가 아닐 듯싶었다. 체격과 외모로만 보면 스크린에 등장하는 꽃미남 배우들도 울고 갈 수준의 남자접대부들이 여자 손님의 시중을 들기 위해 진을 치고 있는 호스트바. 샤넬은 그날 영미 앞에 늘어서서 낙점을 기다리는 일곱 명의 ‘선수’들 중 한 명이었다. 영미는 엉겁결에 친구 따라 강남 간 처지여서 굳이 비싼 돈 써가며 2차를 나갈 생각이 없었기에 일곱 명 중에서 허벅지 굵은 선수보다는 당장의 분위기를 잘 띄울 좀 뺀질거리는 선수를 원했다. 면면을 살피다 적극적으로 눈웃음을 보내온 선수를 지명했는데 그가 샤넬이었다. 그런데 같이 놀다보니 이 남자가 혹시 나를 위해 세상에 온 것은 아닐까 싶도록 마음에 쏙 들었던 것이다. 영미는 밤업소 생활을 하면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남자가 살고 있다고 여겼다. 아가씨를 배려해주는 남자와 그렇지 않은 남자. 샤넬은 후자의 전형처럼 보였다. 영미가 양주를 마시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는 돌아오는 술잔마다 대신 마셔주는 이른바 기사도를 발휘한 점도 그렇고, 영미가 화장실에라도 가면 기꺼이 따라와 문밖에서 따뜻한 물수건을 준비해서 기다렸다가 수갑을 채우듯 손목을 잡아 닦아주고는 손등에 입맞춤을 해주는 서비스도 감동이었다.
샤넬이 나이는 두 살 어렸지만 혈액형도 같고 생일이 같은 9월이라는 것도 신기했다. 다른 달에 태어날 수도 있는데 굳이 9월이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매운 짬뽕과 김치찌개를 좋아한다는 점, 화려한 장미보다 좀 도도한 백합을 좋아하고, 고구마보다 감자를, 얼굴이 예쁜 것 보다 마음이 예뻐야 한다는 것, 입으로 말하는 사람보다 눈으로 그윽하게 말하는 사람이 좋다는 바른 가치관, 그리고 물냉면보다 비빔냉면을 좋아하는 이유가 참기름 때문이라는 솔직함도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샤넬은 안쓰러운 사내였다. 어려서 엄마를 잃고 방황하다 결국 호스트바까지 밀려왔다는 가여운 인생 스토리에 영미는 몇 번이나 눈시울을 적셨는지 모른다.
그날 밤 계획에 없던 2차를 나갔다가 받은 서비스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뜨거워진다. 샤넬이 진심을 담아 처음으로 시도했다는 두 시간이 넘는 전희. 그것은 뭐랄까, 영미의 전신에 퍼져있는 감각 세포들을 일일이 찾아가 입김을 불어넣고 마사지를 하는 고전적인 방식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촉감이 이날은 어찌나 정교하게 짜릿한지 영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세포들이 아귀가 틀어지고 흐트러지는 느낌이랄까. 나중에는 온몸의 신경망까지 샤넬의 입술과 혀에 미쳐갔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영미는 다리를 양껏 벌리고는 샤넬의 뿌리를 잡아당겼다. 마침내 샤넬의 단단한 뿌리가 영미의 몸을 깊숙이 파고 들었다. 영미는 그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단지 하나의 뿌리가 골반 안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온 우주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영미는 급격하게 허물어지며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다 정신을 잃었던가.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리지 않았다면 영미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프런트에서 걸려온 전화기 속 목소리는 다급했다. 무슨 일이지요? 119를 부를까요? 옆 객실에서 신고가 들어왔거든요. 여자 손님이 죽어가고 있다고요. 괜찮으십니까? 영미는 그제야 사태를 짐작하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죽었다 다시 부활한 것 같아요.
“아무리 좋아 미쳐도 그렇지, 무슨 차까지 사주면서 연애를 한단 말이냐. 갑부의 마나님도 아니고 겨우 조개 팔아서 입에 풀칠하는 주제에.”
장 마담의 목소리에 화가 가득했다. 영미가 풀 죽은 소리로 대꾸했다.
“그러게요. 제가 그때 정신 줄을 놨던 것 같아요.”
“그 놈이 사 달라고 한 거냐 아니면 네가 사다 받친 거냐. 자동차 말이야. 그 사정이나 좀 들어보자.”
영미는 다시 경철을 노려보았다. 괜한 말을 꺼내서 사람 창피하게 한다는 불만이 눈빛에 가득했다.
“그러니까, 그날은 그 아이 생일이었어요.”
“아, 샤넬 님 생신!”
장 마담이 이죽거렸다. 영미는 눈을 지그시 감고 기억을 떠올렸다.
“같이 술 마시는데, 얘가 갑자기 무릎에다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거예요. 놀라서 왜 그러냐고 물었지요. 그랬더니 대뜸 엄마가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죽어가는 목소리로, 이럴 때 차라도 있으면 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엄마 산소까지 달려가 같이 뵙고 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그 모습을 보니 슬퍼서 미치겠는 거예요. 꼭 엄마 잃은 송아지가 방울눈에다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저도 울컥했지요. 눈시울을 닦아내며 가만히 생각을 했어요. 우리 두 사람이 차를 몰고 산소를 찾아가는 여정을요. 그림이 정말 멋졌어요. 그래서 제가 크게 눈을 감았다 뜨고는 결정을 했어요. 이건 내가 빚을 내서라도 해결을 해줘야 하는 값진 민원이다! 왜냐하면 그는 어미 잃은 송아지였으니까요.”
“아이고, 미친 년! 염병에도 급수가 있다더니... 이런 정신 빠진 년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을까.”
장 마담이 영미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혀를 찼다. 실실 웃던 경철이 한마디 보탰다.
“그만하고 찢어져 다행이에요. 샤넬 덕분에 우리 영미 인생 공부 제대로 한 셈이니 그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이지요.”
구석 자리 손님이 겉옷을 챙겨들었다. 경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갔다. 장 마담이 영미 쪽으로 고개를 기울여 나직하게 말했다.
“어쨌거나 시쳇말로 물 들어올 때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한다. 우리처럼 감가상각 비율이 가파른 업종도 많지 않아. 젊은 날은 벚꽃과 같다. 어렵게 피었다 쉽게 지거든. 꽃잎 떨어지고 나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 다찌 생활도 그렇다. 마음은 이제 잘 할 수 있겠다 싶은데 현실에서는 그게 바로 퇴출 시점이야. 그러니 이 악물고 일해서 악착같이 모아야 해. 한눈 팔지 말고. 넌 더구나 가족들 생계까지 맡고 있잖아.”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