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역사 품은 곶자왈, 기억의 공간 조성
제주 4·3 역사을 품은 곶자왈에서 발견한 동굴유적을 포함한 4·3관련 산림역사문화유적의 보존 및 활용방안이
마련된다.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는 지난 2012년도부터 2016년도까지 곶자왈연구시험림(605㏊)을 대상으로 4·3 유적분포를 조사했다. 그 결과 복원 및 활용
가능한 유적이 다수 발견됐다.
대표적인 유적은 조천읍 선흘리의 목시물굴과 먼물각 동굴유적, 저지리의 볏바른궤 동굴유적
등 3곳이다.
목시물굴에서는 고무신과 백자편 등 현대 유물이 발굴되었고 먼물각 동굴유적에서는 편평한 현무암으로 된 할석이 깔려있다.
이 할석은 4·3 당시 은신해 지내던 주민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구전되고 있다. 볏바른궤 동굴유적에는
근현대의 것으로 보이는 옹기편과 백자와 같은 그릇 및 탄피 등이 발견됐다.
이와 같이 곶자왈연구시험림에서 4·3관련 유적이 다수 발견됨에 따라 원형
복원과 주위 정비를 포함한 교육 및 탐방자료로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난대·아열대산림연구소 관계자는 “곶자왈은 생태학적 자원으로서만이 아니라 4·3과 같은 역사의 현장으로서도 중요성을
갖는 곳이므로 발굴 및 보전 연구를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주 4·3 사건이란 ?
제주 4·3 사건이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 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다음 백과 사전 인용:유로저널 편집부>
1948년 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 주민들
해방 이후 제주도는 사회주의 세력과 미군정의 지지를 받은 우파 세력이 대립하다가 1947년 3·1절 기념 집회에서 미군정 경찰이 제주도민들에게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면서 갈등이 증폭된다. 경찰과 서북 청년단 등 우파가 행한 제주도민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여 제주도민들이 1948년 4월 3일을 기해 일제히 봉기했다. 폭력적 탄압 중지, 단독 선거 반대, 단독 정부 반대, 민족 통일, 미군정 반대, 민족 독립 등의 정치적 구호를 내세웠다. 미군정은 군을 투입했고 진압 과정에서 약 28만 명의 도민들 중 약 10%에 해당하는 3만여 명이 군·경 토벌대에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발발 1년여 만인 1949년 봄에 종결되었는데 언급 자체를 금기시하다가 1990년대 들어서야 역사적 재조명 되었고 2000년 1월 국회에서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진상 조사와 피해자 파악이 실시되었다.
제주 4·3 사건(濟州四三事件)
제주 4.3평화공원 다랑쉬굴 학살 현장 재현
한국 유로저널 노영애 기자
eurojournal26@eknew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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