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이룩한 문명의 발전은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질문은 기계문명을 발전시키는 시작점 그 이전의 역사인 셈이다.
질문이전의 세계는 상상력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상상의 나라에서만 존재하는 비현실 세계인 것이다. 비현실 세계는 질문으로 비밀의 문을 조금씩 열어 보인다. 그러한 질문이 농익었을 때 어설픈 그림으로 세상에 선을 보이게 된다.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그림의 실체에 대해 사람들은 여러 반응으로 화답을 한다.
심한 경우 이단으로 몰리는 경우가 있으며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일상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시작된 상상력, 질문, 그림은 어느 비등점에 다다랐을 때 현실이 되는 좁은 문을 통과하게 된다. 기계 문명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다 어느 정점에 다다르게 되면 발전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멀지 않은 시기를 더듬어 보면 기업들의 제품 선전의 핵심 문구는 기술에 관한 거였다.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진 제품임을 강조한다.
기계문명의 최고조 발전 시대는 기술을 거론하지 않는다. 최첨단 기술은 이제 보편적인 상식이 되어 버렸다. 핸드폰을 처음 구입하기 위해선 통신 보안 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두꺼운 소책자 하나가 포함되어 있었다. 핸드폰 사용 설명서를 적어도 일주일은 정독해야 만이 전화기를 자유자제로 다룰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는 더 복잡한 기기를 손안에 들고 있어도 설명서 한 권 딸려오지 않는다. 자기 몸도 다스릴 수 없어서 아장 아장 걷는 아이일지라도 스마튼 폰을 다룰 수 있는 시대다. 기술 차원을 넘어서서 그 기계가 얼마만큼 인공지능을 가지고 사람과 동감할 수 있는지를 강조한다. 사람이 물건을 만들고 그 물건은 다시 사람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준다. 결국 인간은 기계문명을 초월할 수 없다. 현대 문명사회에서 단 몇 시간만이라도 전기가 단절된다면 비상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모든 업무는 마비될 것이다. 인간이 만든 문명 세계는 결국 인간의 삶을 지배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게 된다.
문명의 발전으로 편리한 세상이 되었지만 기계문명이 접근할 수 없는 마음과 생각은 더 외로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는 세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현대는 ‘혼밥’이 유행하고 있다.
모햄버거 회사의 선전은 혼자 밥을 먹는 사람의 고민을 영상으로 담아내 눈길을 끌고 있다. 그들을 위해 혼자 밥 먹어도 당당한 햄버거를 출시했다.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혼자 밥을 먹는 사람, 혼자 여행을 하는 사람, 혼자 등산을 하는 사람, 혼자 산책을 하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유독 우리민족만 혼자 하는 것을 꺼려한다. 왜 일까? 결국 외로움 때문이 아닐까 한다. 기계문명의 숲에서 인간은 길을 잃고 해매이고 있기 때문에 외로움의 골은 깊어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홀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두려움이 되기도 한다. 홀로 산책을 하다 보면 지나는 사람들이 힐끗 쳐다본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더불어 살아야 하며 서로 부딪히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이 만든 모든 기계 문명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커피숍에서 한 테이블에 선남선녀가 테이트를 즐긴다. 혹은 여러 명이 앉아 차를 마신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각 손전화기를 가지고 무언가 개인적인 일을 한다. 개인적인 기계문명이 발달되지 않았을 때는 무언가를 함께 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그 이야기 속에는 마음과 생각이 담겨 있고 놀라운 상상의 세계의 틈새를 보여주기도 한다.
눈부신 발전은 인간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대화를 단절시킨다. 눈과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기계로써 단답형의 글로써 정보를 서로 주고받게 된다. 정보만을 주고받으니 오래동한 한 공간에 있어서 마음을 나누는 벗이 될 수 없게 되는 것이고 군종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란 사람을 돕는 일일 것이다. 단독아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기쁨의 일이기도 하다. 원래 소외된 지역에 자원봉사를 하게 되면 도움을 받는 사람보다는 도움을 주는 사람의 입장이 더 미안해지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이유인 것이다. 도우면 도울수록, 섬기면 섬길수록 더 도와주고 싶고, 더 섬기고 싶어지는 것이다. 1993년에 개봉된 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 영화는 1,100명의 유대인들을 독일 나치로부터 구해낸 사실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주인공 쉰들러는 유대인 공장 직원들을 앞에서 죄책감에 떨고 있었다. 그리고 미안해했다. 자신이 차고 있는 시계, 이것만 팔았어도 몇 명은 더 구해낼 수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를 한다. 충분한 섬김과 도움이 있었지만 베푸는 사람 입장은 다 내어주고도 부족함을 느끼는 것이다.
한 정신과 의사는 내방하는 환자가 별다른 차도가 없자 더 이상의 방법이 없어서 독특한 처방을 내려 주었다. 그것은 약물이나 병원을 내방하여 치료 받는 것이 아니라 소외된 지역을 스스로 찾아가 봉사하는 일이었다. 처음 환자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한 두 번 간 이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 질환이 깨끗하게 치유 받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웃을 생각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면 더 많은 질병이 인간을 괴롭힌다는 것은 이미 상식이 되어 버렸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현대 문명의 모든 기기들은 홀로 살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기계문명으로 인하여 거실 문화가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저녁이면 온 가족이 거실에 둘러 앉아 텔레비전도 함께 보고 식사 하며 하루에 있었던 일과를 나누는 것이 보편적 가정의 모습이었다. 이제 이러한 일상은 깨진지 오래되었다. 가족이라 하여 함께 식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출근 시간이 다르고 퇴근 시간도 다르고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각자 주어진 공간으로 들어가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다. 텔레비전도 홀로 보고, 때론 간식도 홀로 먹는 것을 즐겨한다. 그렇게 가정에서부터 홀로 사는 훈련이 되어 있다 보니 사회적으로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에서도 홀로 할 수 있는 것을 찾게 된다. 홀로 사는 만큼 인간은 고질병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된다. 부산을 여행하면서 한 대형 건물 앞에 의미 있는 조형물을 발견한다. 방문객들은 그 조형물 아래에서 기념 촬영을 한다. 두 손을 모은 거대한 조형물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 그 아래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떨까? 무엇을 느낄까? 조형물이 주는 의미는 보호라는 단어가 지배적이다. 누군가로부터 보호 받고 싶어 하는 것, 또한 누군가를 보호해야 하는 것은 보편적 인간이 가진 생각의 이념 그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본질일 것이다. 문명을 발전시킨 것은 인간이 보호 받기 위한 방편이었다. 좀 더 편리하기 위해, 더 친밀하게 보호받기 위해 기계 문명을 발전시켰으나 결국 그 문명 숲에서 인간은 홀로 고독하게 길을 잃고 있는 셈이다.
요람에서 무덤직전 까지 인간은 성장하도록 되어 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인생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다. 나이가 어리다 하여 불안전하거나 미완성 인생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숙되어 가고 완숙되어 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 사람의 성숙도는 누군가를 위한 타인의 공간이 그 안에 존재한 만큼 일 것이다. 자기만을 위해, 자기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만을 위한 삶이라면 성숙한 삶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보호받고 도움을 받은 것 그 이상으로 나를 통하여 누군가가 보호받고 도움을 받는 순환적 삶이어야 한다. 도움을 받는 사람 보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더 행복한 법이다. 세상은 다양한 방법으로 삶의 길이 형성되어 있다. 어느 한 길만이 정답일 수 없다. 존재하는 인간의 숫자만큼이나 되는 길 중에 근본은 그렇게 다양하지 않다. 나를 통해 보호 받는 사람, 나를 통해 기쁨을 누리는 사람, 나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이 내 인생의 성숙도일 것이며 인간이 걸어야 할 본질적인 길일 것이다. 많이 가진 것, 많이 배운 것, 세상으로 증명할 만한 스펙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늘여 가는 것이며 그들에게 끼치는 크고 작은 영향력이 인간을 성숙하게 하는 성약(聖薬)일 것이다.
박심원 유로저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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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드림커뮤니티교회 공동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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