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영하고 있는 여인’
수영하고 있는 여인, 피카소,
1918
입체파
작품을 처음 선보인 지 11년 만에 , 피카소는 돌연 신고전주의를 답습하는 것 같은 이 작품을 내놓았다.
신고전주의적 경향의
작품 중 하나인 ‘수영하고 있는 여인’은 피카소가 1917년 로마를 여행하면서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당시 예술계 한편에서는 그가 입체주의를 버리고 신고전주의로 돌아갔다는 비판이 일었다.
그러나, 피카소는
단순히 신고전주의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당당하게 자신만의 기법으로 이전의 것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던 것이다.
‘세 명의 악사들’
이런 자신의 천재성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 다시 9년 만에, 그는 기하학적 구성이 돋보이는 ‘세 명의 악사들’을 선보였다. 이것은 피카소의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명작이다.
세 명의 악사들, 피카소, 1927
·
‘게르니카’
다시
10년 후, 1937년 1월, 피카소는 당시 스페인 공화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을 장식할 벽화를 주문받았다. 애초 피카소는 ‘화가의 작업실’을 주제로 작품을 구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독일군과
스페인 공산당에 의해 폭격당한 게르니카의 소식을 전해 듣은 그는 주제를 전격 교체하여 5주만에 20세기의 기념비적 회화로 평가받고 있는 ‘게르니카’를 완성했다.
게르니카, 피카소, 1937
역사상 유례가 없는 민간인 학살 현장이었던 1937년 4월 26일의 게르니카는 나치와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 정부에 의한 폭격으로 1500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끔찍한 사건이었다. 이에 분노한 피카소는 전쟁의 참극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흑백의
모노톤으로, 비유적인 형상들로 가득한 평면적인 작품을 완성했다.
“황소는 파시즘일 뿐 아니라 잔악성과 어둠을 상징한다. 말은 국민들을 상징한다. ‘게르니카’는 상징적인 작품이다.” 피카소의 이 말처럼 ‘게르니카’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벌어진 시민들의 죽음과 고통을 담고 있다.
마치 무고하게 죽은 이들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상처 입은 말의 모습은 스페인의 애국지사들을 대변하고, 죽은 자식을 끌어안은 어머니의 모습은 전통적인 ‘피에타’를 연상시키며 슬픔을 극대화한다.
오늘날 ‘게르니카’는 하나의 도상으로 남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공산 정권과 관련된 이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던 작품이다. 게다가, 이것은 1939년 스페인 내전이
결국 프랑코 측의 승리로 끝남으로써 피카소를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로 만들어 결국 미국으로 망명까지 하게 한 작품이다.
"스페인이 민주화 되기 전에는 게르니카를 스페인에 걸 수 없다”라는 피카소의 소원대로, ‘게르니카’는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순회 전시 된 후 뉴욕현대미술관에 한참을 머물렀었다.
그후, 1975년 11월 프랑코가 죽고 1981년이 되어서야 이 작품은 스페인으로 반환되었다. 현재는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 (Museo
Reina Sofia)에 소장 중이다.
당시 나치의 파리 점령 직후 한 게슈타포 장교가 피카소에게 물었다. “당신이 ‘게르니카’를 그렸소?" 이에 피카소는 “아닙니다, 당신들이 그렸지요”라고 대답했다.
·
'한국의 학살'
피카소는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했지만, 프랑스 정부에서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 프랑스 시민권을 갖지는 못했다. 그는 스탈린을 익살스럽게
비판한 그림 때문에 1957년에 제명되기까지 실제로
프랑스 공산당원이었다.
한국 전쟁에서 벌어진
미국의 잔혹 행위 (미국이 충청북도 영동군 노근리에서 한국인들을 전투기와 기관총으로 학살한 노근리 학살)에 대해서도 비판하면서 그는 1951년 '한국의 학살'(Massacre in Korea)이라는 작품을 발표했고, 유엔과 미국의 한국전쟁의 개입을 반대했었다.
피카소는 이 작품이
고야의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과, 마네의 ‘막시밀라안의 처형’의 구도를 참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학살, 피카소, 1957
Les Fusillades du 3 Mai, Francisco Goya, 1814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마네, 1867
이러한 수많은 도전을
통해 피카소는 르네상스 이후 500여 년간 서양미술을
지배해왔던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미학에서 과감하게 벗어나, 인물의 옆모습과 앞모습을 같은 평면에 그려넣거나 팔다리를 길게 늘이는 등 추상적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완성해 나갔다.
즉,
우리들에게 피카소는 입체주의 화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시기에 따라 장르를 막론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 화풍을 변화시키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한 예술가다.
그래서 그에게 입체파라는 길을 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후기 인상파 세잔과 더불어, 피카소는 다음 세대의 미술가들에게 예술의 진정한 자유, 즉 보이는 것과 무관한 형태, 작품 속에만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를 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3) 감정적 가치
피카소의 많은 작품량은
미술시장의 규모를 크게 만들었고, 그 가격이 유지되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또한 피카소 작품은 웬만한 컬렉터라면 관심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가격 폭도 상당히 넓다. 1000억원 이상을 호가하는
유화도 있지만 동판화는 약 300만원짜리도 있다.
게다가 그의 흥미로운
개인사도 피카소 자신의 신화적 면모를 강화시키며 작품 값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 피카소는 두 번 결혼했고, 세 명의 여자와 네 명의 자식을 낳았다. 일곱 명의 여인들과 염문도 뿌렸다.
그래서 그의 삶 자체가 말그대로 보통 인간들의 애정, 애증, 고통, 갈망, 행복, 외로움, 집착 등의 다양한 감정을 대변함에 따라, 대중들은 이 영웅의 여정에서 자신들과의 비슷한 보편적 근사함을 느낀다.
피카소의 여인들
한편, 그의 이러한 복잡한 여자관계로 인해, 비평가 존 버거는 피카소의 그림들에서 그의 성병에 대한 두려움을 읽어낸 바 있다. 미술사가 윌리엄 루빈도 ‘아비뇽의 처녀들’속에서 변형되어 그려진 얼굴이 매독 증상을 상징하는 것 같다는 해석을 내놓기도 했다.
3. 그림 가격 떨어지나?
피카소의 화려한 여성 편력은 그의 가족들에게 있어서는 그리 행복한 일은 아니었다.
첫째 부인 올가의 손녀인 마리나는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다가 20대 때에, 갑자기 할아버지의 19세기풍 빌라와 함께
회화 300여점을 포함한 작품1만 여점을 유산으로
물려 받게 되었다.
피카소의 소녀 마리나
“어린시절 나는 가난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대저택 앞에 서서 돈을 구걸한 적도 있다. 할어버지는 진심으로
나를 손녀로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2015년 할아버지인 피카소
작품들을 시장에 대거 방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당시 전 세계의
미술 시장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마리나 피카소는 최근 "1935년작 회화 '가족'을 시작으로 할아버지의 작품을 하나씩 팔아 그 돈으로 베트남에 어린이 병원을 짓는
등 자선 사업에 쓰겠다"고 밝힌 바 있다.
처음에 이 피카소 작품의
대량 방출 사건을 놓고 미술시장은 몹시 당황스러워 했다. 대량 공급에 따라 피카소
작품 값이 떨어지면, 다른 작품 값도 순차적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미술시장은 우려했다. 왜냐하면 미술품의 가격은
희소성과도 비례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손녀가 상속받은 작품이니만큼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명화(名畵)'가 포함돼 있을 수도
있다는 추측들도 돌았다. 그래서 갑자기 최상급
작품들이 한꺼번에 시장에 풀리면 새로 나온 작품들도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작품들의 가격도 동반 하락할 수 있다고 예측했다.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블로그 :
blog.daum.net/sam107
페이스북 : Art
Consultant Jihye Choi
Designed by sketchbooks.co.kr / sketchbook5 board skin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