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소설 (23회)
바람의 기억
3. 우림각의 전설 장 마담을 만나다
“사실 고기도 고기지만 이 집 최고의 무기는 바로 이거야. 부추오이무침. 내가 손님을 모시고 와서 늘 권하는 겉절이지, 남자든 여자든 이걸 많이 먹어야 밤에 힘을 제대로 쓰거든.”
“부추가 좋다는 건 들었지만 오이도 그런가요?”
영미가 양념을 뒤집어쓴 오이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살피고는 장 마담을 바라보았다.
“그렇고말고. 부추가 집을 부순다는 의미의 파옥초나, 과붓집 담장을 넘는다는 월담초, 소변 줄기로 벽을 부술 수도 있어 파벽초로 불리는 식물이라는 것은 다들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오이 또한 대단한 일꾼이라는 것까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아.”
“에이, 언니도 참, 오이는 물뿐인데 그게 무슨 힘을 쓰겠어요?”
젓가락을 입으로 가져간 영미가 오이를 앞니로 잘근잘근 자르며 말했다.
정아는 두 사람의 대화를 귓전으로 흘려보내며 연신 출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혹시 미친개가 식당으로 들어온다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 그가 식당으로 들어서면 얼른 밖으로 데려나가는 게 상책일 것이다. 그러자면 이편에서 그를 먼저 발견해야 한다. 미친개가 전에 딱 한 번 학원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돈을 받으러 왔다기보다 학원에서 정말 근무 중인지를 확인하러 온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수업 중인 것만 창 너머로 확인하고는 돌아갔었다. 정아는 다시 슬쩍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딘가에 미친개의 애마가 있을 것이었다. 미친개의 차는 이 섬에서는 흔하지 않은 대형 외제차여서 어디서나 눈에 잘 띄었다. 정아는 일어서서 주차장 전체를 둘러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정아는 가방 끈이 기니까 알거야. 과년한 딸이라고 할 때 과년이 무슨 뜻인지.”
갑작스런 장 마담의 물음에 정아는 화들짝 놀라 자세를 고쳤다. 영미가 끼어 들어서 우리 같이 나이든 노처녀를 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장 마담이 고개를 저었다. 정아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작은 소리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혼기에든 처녀를 말하는 것 같은 데요.”
그제야 장 마담이 손뼉을 쳤다.
“맞아, 정확하다. 그러니까 나이로 치면 이팔청춘이라고 열여섯 살 정도 되겠지. 우리나라로 치면 춘향이고 서양으로 치면 줄리엣의 나이랄까. 서양은 만 나이로 치니까.”
“아이고 그런 젖비린내 나는 나이에 무슨 결혼이에요.”
“우리 엄마는 열아홉에 나를 낳았어, 이것아.”
영미가 가볍게 반발하자 장 마담이 단번에 눌렀다.
“하긴 전에는 다들 시집을 일찍 갔으니까. 근데 그게 오이와 상관이 있나요?”
영미가 불판에 새로운 고기를 올려놓으며 물었다. 장 마담이 잔에 남은 맥주를 비웠다.
“상관이 있지. 과년의 과는 한자로 오이 과(瓜) 자를 쓰거든. 한마디로 과년이란 오이를 받아들일 나이라는 거지. 언뜻 생각하면 오이의 생김새가 남자들 물건과 비슷해서 그런 게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사실 그렇게 모양으로만 따지면 가지나 주키니 호박이 더 실감나잖아. 그렇지? 그렇다면 옛날 그 똑똑한 어른들이 그 아름다운 단어에다 하필 오이를 넣은 것일까.”
“아이고, 갑자기 왜 이리 얼굴이 붉어진다니.”
영미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가시나, 이거 그렇게 부끄러운 얘기 아니야. 네 말마따나 오이에는 물이 가득하다는 것에 주목해야 해. 물을 생명의 원천이라고 하잖아. 그런 에너지원이 가득 든 게 바로 오이인 거야. 그런 오이를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가 바로 과년이라는 거고.”
“어머나, 되게 중요한 말씀인 것 같긴 한데 생각이 자꾸 오이의 생김새에만 꽂혀서 얼굴이 화끈거려요.”
영미가 붉어진 얼굴로 까르르 웃었다. 장 마담이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흘겼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양기가 듬뿍 든 꽃등심과 부추를 아무리 먹어도 오이와 같은 물의 뒷받침이 없으면 균형이 깨져서 무용지물이라는 거지. 그러니 이렇게 세 가지를 고루 싸서 먹어야 비로소 남자에게는 양기가 되고 여자에게는 음기가 되는 거다.”
“근데 이게 과학적으로 입증이 된 거예요?”
장 마담은 손수 싼 상추쌈을 정아의 입을 향해 내밀었다. 정아는 주저하다 입을 벌렸다.
“이건 과학이 아니라 우리 집에서 우리 어머니가 일생 동안 아버지를 상대로 임상실험을 거친 것이니 믿어도 돼. 별로 금슬이 좋지 않았던 분들이 오직 부추와 오이의 도움을 받아 우리 9남매를 두셨으니까.”
“하하하... 그렇다면 믿을 게요. 아무튼 여자나 남자나 물이 많아야 사랑 받는 건 사실이에요.”
“이년 또 오버한다. 근데 이런 양기 식품을 충분히 섭취해도 남자는 몇 살이면 성 기능에 빨간불이 들어올까? 아까 과년의 계산법이 8 더하기 8해서 16세라면, 남자들 성기능의 종점은 바로 8 곱하기 8이라는 사실. 그러니까 64세지. 대개 이쯤이면 팔팔한 시절이 마감된다고 봐야 돼.”
영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했다.
“그럴 리가요. 요즘 제 손님 중에 80대 어른이 세 분이나 계셨는데, 아이고 그 분들, 하나 같이 힘이 장사였어요. 약물 도움을 받은 분도 있겠지만 어쨌든 손님들 중에 노익장들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물론 요즘은 열여섯 살이 오이를 받아들일 나이가 아니듯, 남자 나이 64세도 성기능에 이상이 생기는 나이는 아니지. 예로부터 남자는 지팡이 들 힘만 있으면 2세를 볼 수 있다고 했으니까. 대략 그렇다는 거야.”
“그 정도가 아니라니까요. 지난주에 나가사끼에서 온 할아버지는요 숫제 잠을 재우지 않았어요. 본인은 제 배 위에서 자다 깨다하면서 밤새 게으른 나룻배 사공처럼 굴었다고요.”
“사공이 노를 안 젓고 존 걸 보면 배가 침대처럼 편안했던 모양이지?”
장 마담의 대꾸에 영미가 웃음을 터트리며 제 머리를 손으로 툭툭 쳤다.
정아는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쪽문을 통해서 밖을 살폈다. 주차장에는 빈 공간을 찾기 어려울 만큼 자동차로 가득했다. 미친개의 차는 보이지 않았다. 정아는 다시 한 번 주차장을 살핀 뒤 자리로 돌아왔다. 장 마담이 정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아는 55 사이즈 정도 입는 것 같구나.”
정아가 자리에 앉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 정아는 볼수록 예쁘지요? 목욕탕에서 보면 은근 볼륨감이 있어요. 근데 참, 오늘 어쩐 일로 저희에게 이런 맛난 것을 다 사주시는 거예요?”
영미의 물음에 장 마담이 잠시 뜸을 들였다. 다시 세 개의 잔이 쨍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뭐 특별한 건 아니고, 그냥 정아를 보는 순간 밥이라도 한 끼 같이 먹고 싶었다. 나는 별 능력이 없지만 딱 하나 자부하는 게 있지. 그건 바로 누군가의 현재 상황을 동물적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안목이랄까. 그러니까 아무리 잘 꾸미고 화려해 보이는 아가씨라도 나는 척 보면 어떤 느낌이 와. 저 아가씨는 위기에 처해있구나, 또는 저 아가씨 오늘 무슨 일 낼지도 모르겠다하는. 어제 저녁에 정아를 봤을 때도 어떤 느낌이 왔었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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