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심원의 사회칼럼

공존해야 더 큰 세상을 얻을 수 있다

by eknews posted Jul 02,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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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해야 더 큰 세상을 얻을 수 있다



지구촌의 주인공은 사람이다. 물론 아니라고 말하는 단체도 있을 것이다. 모든 가치를 사람에게서 둔다. 예를 들면 짐승들의 생물학적인 군을 규정할 때 사람과 가까이에 있는 동물을 들어 군으로 묶는다. 


동물의 왕으로 불리는 호랑이는 고양이 과에 속한다. 이 사실을 호랑이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호랑이 뿐 아니라 백수의 왕으로 군림하는 사자도 고양이 과에 속한다. 사자에게는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작은 동물 군에 포함되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이다. 동물들은 각각 개성이 있고 다른 존재이지만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그렇게 한 묶음으로 묶어 놓은 것이다. 이로 보건데 지구촌에 살고 있는 수많은 생명체의 주인공은 바로 사람이라는 증거가 된다. 이름을 짓는 다는 것은 존재를 규정하는 일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을 짓는 것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이름을 지어준다. 사회 공동체에서 단순하게 불리는 이름은 자기 스스로가 붙이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규명하는 권력의 힘에 의해서 붙여지는 것이다.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 주인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은 누군가로부터 이름을 부여 받았다. 자기 보다는 더 큰 존재로 부터 부여 받은 것이고, 사람은 일생 그 이름 안에 갇혀 살게 된다. 나라는 존재를 증명할 방법은 부여된 이름이다. 어렸을 때 아버님은 군대와 관련된 사람들과 잦은 모임을 가지셨다. 


기억에 나지는 않지만 높은 계급을 가진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곤 했다. 아버지에게 그들은 대장님이라 부르곤 했다. 그래서 어렸을 땐 아버지가 군대의 대장인줄 알았다. 실상은 그들이 그냥 그렇게 편하게 아버지를 불렀던 것이다. 대장이라 불렸지만 아버지에게는 대장으로서의 권한이 주어지질 않았던 것이다. 이름이나 명칭은 자기 스스로 부르거나, 혹은 친구들이 불렀다고 해서 그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명칭은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부르는 이름이나 직함, 공동체가 부르는 직함이 다른 공동체에서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다른 문화권에서도 그 직함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이나 명칭이 중요한 것은 인간은 홀로 사는 단독아의 모습이 아니라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에는 자기 옳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공동의 질서가 필요하다. 과거에는 힘 있는 자가 말하는 것이 법이 되었다. 그러나 성숙한 공동의 질서는 어느 한 사람의 말이 의미가 있다 한다면 공동체 구성원이 이해할 수 있고 동의를 해야 만이 공동의 이념으로 발전할 수 있다. 


인간은 홀로 살 수 없기에 어떠한 형태로든 집단이라는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야 한다. 집단은 결국 나를 낮추고 너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한 사람만의 주장이 강하다면 그것이 독재가 되는 것이다. 물론 집단이 만들어 지는 것은 한 사람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 기업도 그러하고, 모든 공동체들이 그러해야 한다. 작음 모임일지라도 그 모임이 발전하려면 자기 일에 손해가 온다 할지라도 앞장서는 그 누군가가 있어야 지속성 있는 모임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다. 


기업은 한 사람의 경영 철학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큰 기업이든 작은 기업이든, 손바닥만 한 구멍가게 일지라도 창업주의 경영 철학위에 세워지게 되는 것은 큰 무리가 없다. 한 사람의 생각에 의해 시작된 것이 기업으로 발전하게 된 후에는 개인적인 경영철학이었던 것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공존의 기업으로 발전해야 한다. 공유할 수 없는 경영철학은 퇴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알고 있던 기업이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그런 현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한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내 생각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어야 하며, 공유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다시금 점검해 봐야 한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을 만나는 만큼 그 사람의 울타리가 결정이 된다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큰 사람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있으며, 작은 사람으로 느껴지는 사람이 솔직히 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한다는 것은 죄를 짓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판단되는 것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처음 만날 때는 느낄 수 없지만 만남이 지속되다 보면 그 사람의 크기가 결정되어진다. 물론 표현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사람의 크기는 결국 마음의 크기일 것이다. 마음이 보이지 않으니까 크기가 있을 수 없지만 결정하여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의 마음의 크기가 느껴진다. 작은 구멍가게에서 출발하여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기업이 크는 만큼 그 이상으로 경영자의 마음의 크기가 먼저 커져 있어야 한다. 그래서 기업을 통하여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동의 행복하고 의미 있는 공존의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솝우화에 이런 내용이 있다. 개를 두려워하는 고양이가 있었다. 고양이는 매일 매일 기도했다. 개가 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였다. 어느 날 고양이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자신을 보고 다른 고양이들이 도망을 가기 시작했다. 샘물가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은 고양이가 아니라 늠름한 개로 변해있던 것이다. 포부도 당당하게 산속을 걷고 있는데 호랑이를 발견하게 된다. 도망은 가야하는데 발에 자석을 붙여 놓은 것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호랑이가 무서워서 살아갈 수가 없었다. 고양이는 다시 기도했다.


호랑이로 변하게 해 달라는 간청이었다.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힘차가 목청을 높여 세상을 향해 짖었더니 호랑의 표호가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세상을 호령할 호랑이로 변한 것이다. 이제 세상은 자신의 것이라 여겨졌다.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자신을 향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었다.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두려움이 다시 생겼다. 그래서 깊은 산속으로 도망을 가게 된다. 두려움에 다시는 세상을 향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기도했다. 사람이 두려워 살 수 없으니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며 간청하게 된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새소리에 눈을 떴다. 그는 기대했다. 아마 내 모습은 사람으로 변해 있을 거야. 그런데 어느 개 한 마리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것이었다. 그는 소리 쳤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개 주제에 달려드는가?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고양이 소리였다. 절망스러웠다. 혼비백산 하여 개를 피해 도망하여 다시 기도했다. 내 모습이 왜 고양이로 돌아갔느냐 따졌다. 그에게 이런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고양이 심장을 가졌을 뿐이야, 그래서 겉모습이 개나 호랑이로 바뀌었을지라도 고양이 심장을 벗어나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너의 모습인 고양이로 돌아 올 수밖에 없는 것이란다.”


자신의 주장이 너무 강하게 되면 타인과 더불어 공존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구멍가게의 수준은 벗어났다 할 수 있지만 결국 뿌리는 구멍가게일 뿐이다. 비록 보이는 규모는 크다 할지라도 시간문제인 것이지 작아지는 것은 불을 보는 것처럼 자명한 사실일 것이다. 함께 공존할 수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이다. 큰 사람은 자신의 것을 공개하고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장을 만들어 간다. 학문의 세계, 전문가의 세계도 그러하다. 

공존할 수 없는 학문, 전문적 기술은 사장되도록 되어 있다. 과거 우리 민족의 약점은 공존하지 않는 것에 있다. 그래서 고려청자를 만드는 기술이 후세에 전달되지 않은 것이다. 공존할 수 없다면 그 사회는 썩을 수밖에 없으며, 더 큰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은 함께 공존할 때 시너지 효과를 생성하게 된다. 


공존한다는 것은 고차원적이면서 마음을 넓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공존의 세상이다. 사람과 사람, 기업과 기업, 국가와 국가 간이 서로 공존할 때 서로가 잘 살 수 있는 상생의 법칙이 만들어 지게 된다. 분명한 사실은 나를 포기하지 않고, 비좁은 나를 찢어 넓히지 않고는 공존의 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내 것을 조금 포기하고 더 많은 것을 얻는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인지, 절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많은 것을 잃어 갈 것인지의 선택은 그 사람, 그 공동체가 가진 정체성 크기와 넓이의 몫이다. 



박심원  유로저널칼럼니스트


- seemwon@gmail.com

- 목사, 시인, 수필가 

- 예드림커뮤니티교회 공동담임

- 박심원 문학세계 

  http://seemwon.com

- 카톡아이디 : seem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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