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28) - 바람의 기억
3. 우림각의 전설 장 마담을 만나다
정아는 뒤를 돌아보고는 전화기를 귀에 바짝 붙였다.
“다들 얼굴에 화색이 도는 걸 보니 얘기가 잘 된 모양이지?”
정아는 고개를 돌려 미친개의 차를 노려보았다. 그는 짙게 썬팅된 유리 안에서 지금껏 이편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가 톤을 높여 다시 이죽거렸다.
“뭘 그렇게 레이저를 쏘며 면상을 구기시나. 눈깔 튀어나오겠네. 그나저나 우림각 입성을 축하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내 머리로는 판단이 잘 안 되는구먼. 나야 뭐 수금할 수 있게 되었으니 백번 환영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 기분이 개운치 않거든. 꼭 밑 덜 닦고 변기 물 내린 것처럼 말이야. 어쨌거나 오늘밤 나랑 자기로 한 건 유효하지?”
계산을 마친 장 마담이 밖으로 나오자 영미가 정아의 어깨를 툭 쳤다. 정아는 얼른 전화를 끊고 영미와 함께 장 마담의 뒤를 따랐다. 장 마담이 차를 빼는 사이 정아는 다시 한 번 미친개의 차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때 운전석 창문이 스윽 내려졌다. 입에 담배를 문 미친개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정아는 재빨리 차에 올라 문을 닫았다.
정아는 보건소로 가는 길에 자주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나 미친개가 따라오는 것은 아닌가 싶어 조바심이 났다.
“검사 받고 접수증을 꼭 받아와야 한다. 혹시 시에서 위생 점검 나오면 그거라도 있어야 하니까. 그리고 보건증은 그냥 우편으로 보내달라고 해.”
두 사람을 보건소 주차장에 내려주며 장 마담이 당부했다. 막 출발하려던 장 마담이 차를 멈추고 창문을 내렸다. 영미가 허리를 굽혀서 장 마담의 말을 들었다.
“너 출근 전에 미리 우림각 답사를 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어. 그리고 한복도 준비하라고 하셨고. 참, 집에 한복 있니?”
영미가 안으로 들어가자는 턱짓을 하며 말했다.
“없는데... 한복은 왜?”
“그게 우림각 유니폼이잖아. 우리 정아처럼 몸매 근사하고 각선미 좋은 아가씨들에게는 불리한 패션이지만, 그게 개업 때부터 이어진 전통이라서...”
영미가 목을 움츠리며 말을 이었다.
“우림각 안에서는 누구나 한복을 입어야 해. 짝을 정하는 초이스 의식에서도 이어지는 연회에서도 모두 한복 차림이거든.”
“난 제대로 된 한복이 없는데... 생활 한복이 하나 있지만.”
정아는 한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개량 한복 말이지? 그건 안 돼. 하지만 걱정 마라. 당분간 내 것을 입으면 되니까. 여벌이 있거든. 우린 체격이 비슷하니 앞으로 서로 돌려 입기 좋겠어.”
영미가 앞장을 섰다. 정아는 먹구름이 짙어지는 하늘을 한차례 올려다보고는 서둘러 영미 뒤를 따랐다.
보건소는 한산한 편이었다. 정아로부터 주민등록증을 받아 접수처에 다녀온 영미가 검사실은 2층에 있다고 말했다. 앞서 계단을 오르던 영미가 위에서 내려오던 빨간 롱코트차림의 여자와 인사를 나누었다. 꽤나 반기는 여자의 태도와는 달리 영미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계단참을 돌던 영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우, 재수 없어. 여기서 저 여우를 만나다니.”
정아가 영미의 일그러진 표정을 살피며 누구냐고 물었다.
“우리 우림각 뻐꾸기라는 년인데, 잰 진짜 싸가지가 장기 출장 중인 년이야.”
정아는 몸을 틀어 슬쩍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계단을 벗어난 여자의 검정색 부츠가 시야에서 금세 사라졌다.
정아는 영미의 도움을 받아 보건증 발급에 필요한 검사를 받았다. 특별한 검사는 아니었고 소변과 혈액검사, 흉부엑스레이를 찍는 수준이었다. 영미는 다음 검사를 기다리는 중간 중간에 아까 계단에서 마주친 여자의 흉을 계속해서 봤다.
“저년이 글쎄 동료에게 굴러온 복을 통째 뺏어간 나쁜 년이거든. 기싸마라고 너도 어제 만났잖아. 내 대타 치러 나왔다가 고바야시에게 퇴짜 맞은 애.”
“호텔에서 기도하다 파트너에게 싸대기 맞았다는 막달라 마리아 말이지?”
정아는 어제 찻집에서 긴 머리 휘날리며 택시를 타러 나가던 기싸마의 풋풋한 모습을 떠올리며 대꾸했다.
“맞았어.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구나. 걔가 피해자지.”
“피해자? 그 정도야?”
“그렇고말고. 기싸마에게는 아주 오래된 단골손님이 하나 있었어. 도쿄에서 한국을 오가며 의료기 사업으로 돈을 번 사람인데, 이 사람이 기싸마에게 아주 푹 빠진 거야. 얼마나 깊이 빠졌냐 하면 기싸마를 위해 아파트까지 알아보고 다닐 정도였으니까.”
“아파트를?”
“그렇지. 아파트를 보러 다닌다는 게 무슨 의미냐 하면 그게 바로 기싸마를 현지처로 두겠다는 의사표시거든. 현지처란 우리 우림각 아가씨 입장에서는 일종의 주택복권 당첨 같은 건데, 현지처가 되면 말 그대로 누군가의 현지 부인이 되는 거지. 그러자면 함께 즐길 살림집이 필요하게 되고. 집이 있으면 생활비는 자연스레 따라오는 보너스라고나 할까. 그리되면 더 이상 우림각에 출근할 필요가 없게 되는 거지. 어쩌다 비행기 타고 날아오는 철새 같은 남편 한 사람에게만 봉사하면 되니까. 게다가 남편 지갑을 열게 하는 재주가 있으면 자동차도 굴릴 수 있고 골프장도 들락거릴 수 있으니 당첨된 복권이 아니고 뭐겠니.”
의사와의 면담 전 마지막 검사는 면봉을 항문에 넣었다가 꺼내오는 거였다. 영미는 화장실에까지 따라 들어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뻐꾸기 저년이 기싸마에게 찾아온 행운을 눈치 채고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 거야. 그러다 어느 날 행동에 옮겼어. 그 남자가 하필이면 기싸마 이슬이 터진 날 출장을 왔는데 그걸 놓치지 않았지. 그날 뻐꾸기는 저를 초이스한 손님에게는 몸이 아프다고 거짓말을 대고는 기싸마 대타를 자청한 거지. 저년이 그날 밤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지만, 그걸로 게임 끝! 그 남자는 기싸마를 다시는 찾지 않았어. 아파트는 뻐꾸기 년 몫이 되었고.”
“에고, 저걸 어째. 기싸마가 참 안 됐다.”
정아는 집어넣은 면봉이 너무 깨끗해서 다시 한 번 항문 깊숙이 찔러 넣으며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안 되고말고 나 같았으면 뻐꾸기년 머리칼을 다 뽑아버렸을 거야. 너라도 그렇겠지? 근데 기싸마는 그게 다 우리 하나님이 결정하신 일이니 괜찮대. 지랄, 괜찮다면서 그 얘기만 나오면 왜 눈물부터 흘리는지 몰라. 물러 터져가지고. 아씨, 그 생각하니 또 열 받네. 기싸마네 하나님도 그래, 자기 딸이 그렇게 아버지, 아버지 부르며 열심히 기도하는데 최소한 호구소리는 안 듣게 해주셔야지.”
흥분한 영미는 보건소를 나와 택시를 기다리면서도 계속해서 뻐꾸기 욕을 해댔다. 정아는 혹시나 미친개의 차가 있나 주위를 살피며 영미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남의 아파트를 채갔으면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자숙하며 살아야하는데, 저게 언제 인간이 되려는지... 아까 뻐꾸기년 여기 왜 온 줄 아니? 보건증 갱신하러 온 거야. 다시 출근하려고.”
“혹시 그 남자랑 헤어진 거야?”
“아니, 전에도 심심하다고 나와서 용돈을 벌어갔어. 요즘 물 좋다는 날은 어김없이 우림각에 나타나서 손님들 면면을 살피고 있지. 어디 더 재력 좋은 손님 없나 하고 눈알 굴리면서. 어찌 보면 뻐꾸기에게 투자한 그 남자도 참 불쌍한 인간이지. 제 여자가 그런 줄도 모르고 올 때마다 선물 보따리를 안겨주고 있으니.”
“그래서 뻐꾸기라는 이름을 얻은 모양이구나.”
영미가 의아한 표정으로 정아를 바라보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