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29) - 바람의 기억

by eknews03 posted Aug 1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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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연재소설 (29회)

바람의 기억



3. 우림각의 전설 장 마담을 만나다


“뻐꾸기는 남의 둥지를 차지하는 선수잖아. 멧새나 종달새 같은 다른 새의 둥지에다 몰래 알을 낳고는 시치미를 떼거든. 그걸 모르는 둥지 주인들은 뻐꾸기 알을 자기 알과 함께 품어서 부화를 시키지.”

“저런, 뻐꾸기에게 손 안 대고 코 푸는 재주가 있는 줄 몰랐네. 그러고 보니 하는 짓이 뻐꾸기 년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년 별명이 그런가?”

“설마, 아무튼 둥지 주인들은 부지런히 먹이를 잡아다 먹이는데, 소름끼치는 건 갓 태어난 새끼 뻐꾸기가 하는 짓이야. 가짜 어미가 먹이를 찾으러 자리를 비우는 사이 둥지의 진짜 새끼나 알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내서 다 없애버리거든.”

“헐, 그게 정말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저만 살겠다고 둥지의 진짜 새끼들을 죽여? 햐, 진짜 무섭다.”

“무서운 유전자지? 나 어릴 적에 집에 혼자 있을 때 뒷산에서 뻐꾸기가 뻐꾹 뻐국 울면 쟤도 나처럼 혼자인가 싶어 괜히 슬프고 그랬는데 말이야.”

정아의 설명에 영미가 저도 그 울음소리가 슬퍼 가끔씩 눈물을 흘렸다고 맞장구를 쳤다. 정아는 문득 근심이 가득한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다. 은지가 태어난 것을 뒤늦게야 안 엄마는 병원으로 달려와 눈시울을 적셨다. 여자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건 여름 적삼 하나로 겨울을 나는 것보다 힘겨운 일이라고. 그러니 앞날이 구만리 같은 너를 위해서도 이 핏덩이를 위해서도 입양을 시키는 게 어떠냐고 애원했다. 그때 자신이 불 같이 화를 내며 쏘아붙인 말이 새삼 생생하게 떠올랐다. 엄마, 나는 뻐꾸기가 아니에요. 나는 새끼를 버리는 무책임한 짓은 절대로 하지 않을 거예요!

택시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몇 대의 택시가 합승을 기대하고 다가왔다가 그대로 달려갔다. 다시 바람이 거칠어졌다. 한낮인데도 차들은 전조등을 켜고 달렸다. 하늘은 오전보다 더 어두워져서 금방이라도 눈발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정아는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밤에도 은지를 영미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미친개가 자신을 노리고 있으니 곁에 은지라도 두고 있어야 안전할 것 같았다. 은지를 집으로 데려오자면 난방이 급했다.

“우리 지금 우림각으로 가는 거니?”

택시 문을 열며 정아가 묻자 영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아는 잠시 집에 들러서 가면 안 되느냐고 말했다. 영미가 자기 집을 말하는 줄 알고 은지 점심 때문이라면 충분히 차려두고 왔으니 걱정하지마라고 대꾸했다.

“네 집 말고 내 옥탑방 말이야. 은지 데려가려면 난방이 급해서.”

“은지가 보일러 고장 났다고 그러던데, 그걸 지금 어떻게 고치니?”

정아가 시선을 떨구며 고장이 아니라 단지 기름이 없는 것이라고 힘없이 말했다. 영미가 정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우림각 먼저 들른 다음 기름 문제를 해결하자. 더 늦어지면 손님들 받느라 다들 정신이 없거든.”

영미의 말에 정아도 동의했다.

차에서 내리자 바람이 거칠게 몰려들었다. 영미의 코트자락이 치솟아 펄럭였다. 정아는 얼른 손으로 엉덩이를 쓸어내려 치마를 단속했다.

“아유, 우리 정아는 진짜 행동 하나하나가 요조숙녀야. 행동거지가 이리 이쁘니 누구한테나 사랑을 받지. 씨발, 바람도 내 치마만 건들지 너한테는 점잖게 굴잖아”

“아가씨 입에서 씨발이 뭐야.”

정아가 눈을 흘겼다.

큰길에서 모퉁이 하나를 돌자 거대한 건물 한 채가 정면에서 다가왔다. 마치 독립기념관을 연상케 하는 한옥. 정아는 우림각을 이처럼 가까이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우림각은 그냥 한옥 흉내만 내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육지부에서 초빙한 최고의 대목 두 사람이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 건축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정아는 담장을 따라 영미와 나란히 걸었다. 기와를 얹은 담장은 경복궁이나 덕수궁의 울처럼 단호하면서도 운치가 있었다. 담장 안의 소나무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밖으로 가지를 내밀어 흔들었다. 정아는 고개를 들어 건물을 쳐다보았다. 매끈하게 뻗은 서까래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들이 마치 우림각 아가씨들의 다리 같아서 마음이 시렸다.

대문은 건물 측면에 위치해 있었다. 굳게 닫힌 대문 옆으로 작은 쪽문이 보였다. 영미의 뒤를 따라 쪽문으로 들어선 정아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었다. 몸이 떨려왔다. 목도리를 한 바퀴 더 감았다. 정원은 건물의 위세에 걸맞게 넓고 정갈했다. 영미는 정아를 정원에 남겨두고 건물 중앙 쪽 유리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아는 왼편 구석에 자리한 작은 못으로 갔다. 그늘이 짙은 못의 가장자리에는 군데군데 눈석임이 있고 그 살얼음 아래로 느리게 움직이는 붉은색 고기들이 보였다. 정아는 그것들의 움직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목을 움츠렸다. 순식간에 담장을 넘어온 바람이 갈지자 형태로 정원을 내달려 나무 밑 응달진 구석을 들쑤시고 돌았다. 키 작은 나무들은 마치 벌거벗은 소녀처럼 몸을 흔들며 진저리를 쳤다. 커다란 나무들도 머리채를 잡혀 휘둘렸다. 검붉은 동백 통꽃들이 바닥을 굴렀고 앙상한 왕벚나무가 마른가지를 흔들며 바들바들 떨었다.

정아는 내가 어쩌다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까르르 웃는 은지의 얼굴이 떠올랐고 비통해 하는 엄마의 모습과 소를 끌고 대문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아는 하얀 시트에 반듯하게 누운 한 남자의 푸르스름한 얼굴이 떠오르자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을 툭 떨어뜨렸다.

그때 쪽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아는 얼른 눈을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어머, 이게 누구에요?”

세 명의 아가씨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아는 체를 했다. 정아는 다가오는 아가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급하게 아, 네, 하고 답례를 했다. 어제 찻집에서 만난 기싸마였다. 정아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마침 영미가 문을 열고 나왔다.

“오라, 다들 이리 일찍 출근하는 걸 보니 비상소집을 당했구나.”

“맞아, 일본 폭설로 비행기 결항이 속출하고 있대.”

기싸마가 대꾸했다.

“지금 마담언니는 출국 못한 손님들 묵을 호텔 예약하느라 진땀 흘리고 있더라. 호텔마다 만실이어서 너희들 오늘은 모텔로 가야할 지도 몰라.”

“와, 오늘 저녁에 호텔마다 방아 찧는 소리 요란하겠네.”

말하고 까르르 웃는 아가씨의 어깨를 기싸마가 툭 쳤다. 영미가 손짓을 보내자 두 명의 아가씨는 종종걸음으로 문 안으로 사라졌다. 영미가 기싸마에게 아까 보건소에서 뻐꾸기를 만났다고 넌지시 말했다. 기싸마의 얼굴에서 이내 웃음기가 가셨다.

“보건증을 갱신했으니 곧 이곳에서 구멍동서 간의 조우가 있으리라 예상된다.”

“그 미친년 어디가 또 근질근질한 모양이지?”

기싸마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아이고, 순한 양이 그런 거친 말을! 참아라, 참아!”

영미는 씩씩거리는 기싸마의 어깨를 몇 번 토닥이고는 등을 떠밀었다. 기싸마가 사라지자 영미는 정아의 손을 잡아 쪽문 쪽으로 이끌었다.

“계획이 변경되었어. 우림각 답사는 다음에 하고 지금 바로 호텔로 가야 해. 폭설 때문에 비행기를 못 탄 고바야시가 또 너를 불렀대.”

“고바야시가, 나를?”

“그렇대도, 이런 경우는 흔치 않다. 대개 하룻밤 자고 나면 다음 날은 파트너를 바꾸고 싶어 하거든. 아무래도 그 친구가 우리 정아의 마력에 푹 빠진 것 같아. 그만큼 속궁합이 좋았다는 반증이기도 하고.”

정아의 뇌리에 고바야시의 단단하면서도 유연했던 하체의 감촉이 설핏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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