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우림각의 전설 장 마담을 만나다
목이 칼칼했다. 정아는 실눈을 떴다. 창이 희붐했다. 생수는 냉장고에 있을 터인데 일어나 거기까지 다녀오기가 귀찮았다. 더구나 인기척에 그가 잠에서 깨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싶어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돋은 볕이 실내를 환하게 밝히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갈증을 참아내며 죽은 듯 눈을 붙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고바야시는 섹스를 식사처럼 하는 사람이야. 아무리 시간이 없어도 하룻밤 세 번을 꼭 채우거든.’ 정아는 영미가 했던 말을 불안스레 떠올리며 다시 잠을 청했다. 그때 왼편 머리 위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정아는 고개를 돌려 눈을 떴다가 순간 소스라쳤다. 침대 위에서 그가 알몸으로 가부좌를 하고 이편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무안해진 정아는 애써 상냥한 어조로 잘 잤느냐고 인사하고는 재빨리 이불을 목까지 당겼다. 그가 앞니를 반쯤 드러내며 손을 뻗어 이불을 허벅지 아래까지 걷었다. 그의 시선이 정아의 가슴을 겨냥했다. 그가 유두를 입에 넣고 혀로 간질거리며 말했다. 이제 작별의 인사를 해야 할 시간이라고. 정아는 영미 조언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실감하며 그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했다. 어금니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의 욕정이 어서 마무리되기를 바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는 먹잇감을 앞에 둔 배부른 고양이처럼 서두르지 않고 여유를 부렸다. 유두를 가볍게 깨물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튕기기도 했다. 손을 아래로 내려 체모를 조물거리다가 더 아래로 내려 질 속에 중지를 넣어 저어보기도 했다. 정아는 눈을 떠 고개를 창 쪽으로 돌렸다. 여명의 시간에도 바다는 여전히 거칠었다.
“저는 피부가 약해서 멍이 잘 들어요.”
애무가 점점 격해지자 정아는 고바야시의 귀에 대고 나직하게 말했다. 그가 유두를 문채 어깨를 들썩거렸다. 마침내 그의 몸이 정아의 하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왔다. 고바야시의 하체가 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아는 흔들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고바야시의 세 번째 ‘식사’는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쉽게 끝이 났다. 일본에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덕분이었다. 사내의 집에서 걸려온 전화는 달아오른 그의 몸을 일시에 냉각시켜버렸다. 당신 숨소리가 왜 그러냐고 다그친 저편의 목소리가 심리적인 압박감을 준 것일까, 그 때문인지 그의 성기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정아는 잰걸음으로 호텔을 빠져나와 보도를 따라 무작정 걸었다. 포말이 미치지 않은 곳에는 제법 많은 눈이 쌓여서 어떤 곳은 발목이 잠길 정도였다. 걷는 내내 정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누가 보면 눈길을 주의해서 걷느라 그러는 것이리라 여기겠지만 사실 정아는 모든 사물들이 자신만을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렇다고 특별히 슬프거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냥 뭔가 허탈했고 노곤했다.
정아는 신호등이 꺼진 사거리에 이르러서야 택시를 잡았다. 차창을 지나가는 눈 덮인 도시의 이른 아침 풍경이 왠지 생경하게 느껴졌다. 택시를 잡으려고 발을 동동거리고 있는 아가씨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저들도 호텔에서 집으로 퇴근 중인 여자들일까. 정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드백을 열었다. 받은 화대가 접힌 허리를 펴며 파랗게 날을 세웠다. 정아는 그가 목욕비를 하라고 쥐어준 돈에서 한 장을 꺼내 기사에게 주었다.
벨을 누르자 영미가 눈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영미가 말없이 손으로 정아의 등을 토닥거렸다.
“은지는 아직 꿈나라에 있어. 어제 늦게까지 나랑 놀다가 잤거든.”
영미가 검지를 입에 붙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정아가 영미의 등을 어루만지며 고맙다고 대꾸했다.
“근데 어쩐 일로 이렇게 일찍 왔니? 고바야시는 해가 중천에 떠서야 보내주는 스타일인데.”
영미가 손을 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가라고 했어. 새벽에 집에서 온 전화를 받고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는데 아마 그 때문에 흥이 깨진 것 같아.”
정아는 고바야시의 긴장된 표정을 떠올리며 말했다. 영미가 정색했다.
“그건 고바야시를 몰라서 그래. 그 사람은 내 배 위에서 용두질을 치면서도 부인 전화 정도는 태연하게 받았거든.”
“오늘은 저편에서 거친 숨소리를 수상하게 여긴 것 같았어.”
영미가 그것 참 쌤통이라며 소리를 죽여 웃었다. 정아는 침대로 가서 은지를 가만히 바라보며 트렌치코트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뒤에서 영미가 말했다.
“사우나 가서 몸 좀 풀고 올 테니까 넌 은지랑 푹 좀 자둬라. 토요일에 정식 출근하려면 오후에 우림각에 가서 미리 한 번 둘러봐야하니까. 피곤하지 않으면 나랑 같이 사우나를 가도 좋고.”
정아는 고개를 저으며 벌써 생리가 끝난 거냐고 물었다. 영미가 욕실에서 목욕바구니를 챙겨 나오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우나 갔다가 미용실 들러서 점심을 먹고 들어올 예정이야. 약속이 있거든. 그러니까 실컷 자고 일어나서 은지랑 냉장고 털어서 뭐든 맛나게 해먹어.”
정아는 문을 열고 나가는 영미의 뒤통수에 대고 알았다고 말했다.
욕실로 들어간 정아는 변기에 앉아 불두덩 아래를 살짝 만져보았다. 손이 닿자 아래가 싸하니 아렸다. 호텔에서 씻고 나왔는데도 고바야시의 흔적이 손에 묻었다. 정아는 화장지를 뽑아 훔쳐내고 패드를 간 다음 욕실을 나왔다. 식탁에서 물을 한 잔 따라 마신 정아는 조심스럽게 침대에 올라 은지 옆에 누웠다. 실내도 공기도 따스했고, 이불 아래는 전기장판까지 깔려 있어서 금방 몸이 풀렸다. 눈이 절로 스르르 감겼다. 잠결에도 어서 일어나 은지 아침을 챙겨줘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음일 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이라도 떠야지 했지만 눈꺼풀도 천근만근이었다.
어느 순간 이마에 차가운 무엇인가가 지나갔다. 놀라 눈을 떠보니 머리맡에 은지가 젖은 수건을 들고 있었다.
“엄마, 어디 아파?”
은지가 울상이 되어 물었다.
“아니야, 엄마는 아프지 않아. 더워서 땀을 좀 흘렸을 뿐이지. 우리 딸은 잘 잤어?”
정아는 손을 뻗어 은지를 품안에 들였다.
“이모랑 테레비 보다가 잤어. 엄마 오는 것도 못 보고. 너무 졸렸거든.”
“잘 했어. 졸리면 참지 말고 자. 그래야 아프지도 않고 예뻐져.”
“진짜 예뻐져? 잠을 자면?”
“그렇다니까. 미인은 잠꾸러기라는 말도 있잖아. 우리 딸 배고프지.”
은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딸은 지금 뭐가 제일 먹고 싶어?”
“왜? 먹는 놀이 하게?”
아이의 대꾸에 정아는 가슴이 먹먹해져왔다. 늘 그림책에 나오는 음식으로 놀이를 하면서 외식을 대신했던 터라 은지는 지금도 그 놀이를 하자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니야, 오늘은 먹고 싶은 것 말해. 엄마가 다 사줄게.”
정아는 코끝이 아려서 살짝 얼굴을 돌렸다.
“와, 정말? 음, 나는 돈까스! 엄마는 뭐?”
“엄마도 돈까스.”
정아는 은지에게 눈물을 보이기가 싫어서 팔로 눈을 가렸다. 산다는 것이 살아내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 아프거나 슬프지 않고, 주리거나 고통스럽지 않게 삶을 꾸리는 방법은 아주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 돈가스는 또 무얼까.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다음호에 계속)
오을식 소설가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93년 「자유문학」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왔으며
제31회 한국소설문학상, 제8회 자유문학상, 제3회 현진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비련사 가는 길」이 2008년 문화관광부 우수도서로 선정되었고
2011년 서울문화예술재단 창작기금을 수혜했다.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 「삶과 문화」 편집인 역임. 한국소설가협회 중앙위원
독일 뒤셀도르프를 거쳐, 현재 베를린에서 머물고 있다.
email: oesnove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