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34) - 바람의 기억

by 편집부 posted Sep 1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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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지는 그림과 글자가 절반씩 들어있는 책들을 10권 넘게 골라왔다. 가만두면 서점의 책을 통째로 고를 기세였다. 정아는 은지를 불러 다음에 또 오자고 말하고 고른 책을 계산대로 가져갔다. 사장이 읽고 있던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안경 너머로 정아와 은지를 번갈아보던 사장이 이게 누구냐며 목소리를 높여 반겼다. 은지가 배꼽 인사를 했다. 계산을 끝내자, 사장은 딸내미가 엄마처럼 예쁘고 인사도 잘 하니 선물을 줘야겠다고 일어나 저편에서 동화책 3권을 가져와 챙겨주었다.

집으로 오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정아는 아까 점심을 먹었던 분식집 옆의 롯데리아로 들어가 햄버거 두 개를 샀다. 이따 우림각에 갔다가 혹시 늦어지면 은지가 먹을 저녁거리였다. 신이 난 은지가 폴짝거리다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옥탑방으로 돌아와 문을 열었다. 앞장서서 방으로 들어간 은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바닥이 따뜻하다고 소리쳤다. 정아는 문을 열 때 이미 실내에 냉기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아는 밖으로 나와 보일러가 있는 뒤편으로 갔다. 연통에서 빠져나온 희미한 연기가 허공으로 올라 흩어지고 있었다. 정아는 보일러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쪽창을 통해 타오르는 노란 불꽃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시골집 아궁이에서 자주 보았던 따스한 저 연노랑 불꽃. 언젠가 소죽을 끓이다가 저런 불꽃에 취해서 그만 꾸뻑 잠이든 적이 있었다. 다행히 엉덩이를 바닥에 댄 자세라 앞으로 넘어지지 않았지만 하마터면 끔찍한 화를 입을 뻔했었다. 정아는 눈을 감고 보일러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에서 열기가 느껴진다는 게 신기했다. 정아는 미친개의 얼굴을 떠올렸다. 거칠고 비정하기 이를 데 없는 그가 무슨 까닭으로 주유차를 불러 보일러를 살린 것일까. 오늘밤 7만원에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했던 제안은 정녕 빈말이 아니었던 것일까. 정아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은지가 전화기를 들고 나와 엄마를 불렀다.

영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영미는 지금 골치 아픈 일이 생겨서 이따 오후에 우림각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내일 오전으로 바꿔야겠다고 말하고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정아는 영미의 흥분된 목소리가 마음에 걸려 곧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정아는 방안에 널린 은지의 장난감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바닥을 통해 올라오는 따뜻한 느낌이 더없이 좋았다. 얼마 만에 오감으로 느껴보는 온기인가. 얼마 전 은지의 감기가 폐렴으로 깊어졌을 때 정아는 보일러 앞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그렇게 중얼거렸었다. 아픈 우리 딸을 위해 단 5분만이라도 불꽃을 당겨주면 안 되겠느냐고. 이미 오래 전 아사한 보일러가 반응할 리 만무했지만 정아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중얼거림을 멈추지 않았었다.

정아는 잠깐 침대에 걸터앉아서 다시 영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갔으나 여전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우림각 일정이 취소되니 오후 시간이 덤으로 느껴졌다. 정아는 은지를 데리고 사우나를 다녀올까 하다가 급히 계획을 바꾸었다.

“엄마 청소 끝내고 나서 함께 아빠 만나러 갈까?”

침대에 누워 새로 사온 책들을 살펴보고 있던 은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다.

정아는 서둘러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까지 끝낸 다음 은지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날씨는 좋아졌지만, 바다는 여전히 거칠었다. 방파제에서 날아온 파도의 입자들이 바람을 타고 는개처럼 흩날렸다. 정아는 버스를 기다리다 근처 꽃집에 들렀다.

“엄마, 장미처럼 예쁜 꽃도 많은데 왜 하얀 꽃을 샀어요?”

버스에 오른 은지가 국화를 가지키며 물었다.

“장미는 어디서든 큰소리로 웃는 꽃이란다. 그런 꽃을 아빠가 계시는 곳에 가져가면 안 되지.”

“이런 꽃은 괜찮고요?”

“그럼, 국화는 슬플 때 같이 울어주는 꽃이니까.”

정아와 은지를 태운 버스는 한라산을 향해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아빠는 맨날 장례식만 보니까 슬프겠다. 그치요?”

정아는 그늘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도 아빠는 씩씩한 얼굴로 늘 웃고 계시잖니.”

“그거야 사진이니까 그렇지. 엄만 나를 바보로 알아. 난 이제 구구단도 6단까지 외우는데.”

정아는 부러 놀란 표정을 지으며 은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요즘 은지는 구구단을 외느라 열심인데, 그건 순전히 텔레비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구구단을 외자’ 프로그램 덕분이었다.

버스는 한참을 달려 두 개의 대학과 도립의료원을 가파르게 지났다. 곧 ‘양지공원’이라는 작은 이정표가 나타났다.

“나 어렸을 때, 우리 아빠는 어디 계시냐고 물으면 엄마가 항상 그랬잖아. 양지공원에 계신다고. 그래서 나는 아빠가 공원에서 일하시는 줄 알았어. 바보같이.”

“오호, 우리 은지 어렸을 때 말이지?”

지금도 어린 것이 어릴 적을 들먹이는 게 귀여워 정아는 은지의 볼을 잡아 흔들었다. 정아도 그때는 인수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던 시절이었다. 공원 어딘가에서 그가 불쑥 나타나 놀라게 할 것만 같았으니까.

버스에서 내린 정아는 곧장 이정표를 따라 걸었다. 제설작업이 깨끗하게 이루어져 걷기가 편했다. 소로를 따라 5분정도 걷자 공원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맨 먼저 화장장의 굴뚝이 보였고 왼편에 자리한 두 채의 추모관 건물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화장장 입구에 조금 전 지나갔던 장례차량이 정차해 있었고 차량 뒤편에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화장장의 굴뚝에서는 누군가의 몸이 흰 연기로 떠나가고 있었다. 연기는 체머리를 흔들며 공중으로 솟았다가 곧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저 굴뚝을 통해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왔던 곳으로 소리 없이 되돌아갔을까. 삶이란 결국 저런 것일 터였다. 잠시 하늘거리다 사라지고야 마는 한 줌 연기 같은 것. 정아는 잠깐 그런 생각을 했다.

정아는 은지의 손을 잡고 화장장 앞을 지나 왼편 길로 내려섰다. 인수는 두 채의 추모관 중 아래쪽 2관에 입주에 있었다. 정아는 아치형 햇빛 가림막 통로를 지나 추모관 2열로 들어갔다.

오늘도 인수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 활짝 웃고 있었다. 정아는 가져온 국화를 화병에 꽂고는 한 걸음 물러서서 인수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알싸한 아픔이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눈을 감았다. 정아는 미안해요, 라고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용서를 청했다. 우림각 취업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니 이해해 달라고. 은지를 키우며 살 수 있는 방법이 그것 밖에는 없느냐고 타박을 한다면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으나 지금 상황이 워낙 나빠서 그리 되었노라고. 정말 미안하다고.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렸다. 정아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아냈다.

은지는 여전히 두 손을 모으고 기도 중이었다. 정아는 다시 인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정아는 마음으로 말했다. 이 생활 길게 하지 않겠다고. 빨리 빚을 갚고 돈이 조금만 모아지면 미련 없이 여길 떠나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엄마는 아빠에게 뭐라고 기도를 했어?”

은지가 정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 은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게 해달라고 했지.”

정아는 은지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고는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아빠 옆집에 예쁜 이모가 이사 왔구나. 할머니 이사 가시고 한동안 빈집이더니.”

“와, 정말 그러네. 아, 이제 알겠다. 아빠가 왜 맨날 웃고 있는지. 바람둥이 아빠 같으니라고!”

아빠를 흘겨보는 은지의 표정이 자못 진지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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