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주희의 살롱 뒤 뱅 ] #1 알자스, 시인의 와인 도멘 오스테흐탁
< 사진 1. 도멘 오스테흐탁 전경 >
2018년 1월, 눅눅한 습기를 헤치고 오랜만에 햇살이 들던 어느 날 알자스 시골 기차를 타고 에피그 Epfig라는 마을에 다다랐다. 도멘 오스테흐탁 Ostertag에 가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북동부에 위치한 알자스 Alsace는 대표적인 프랑스 화이트 와인 산지이다. 세계적인 품종인 리에슬링Riesling을 비롯하여 피노 블랑, 피노 그리, 게붸흐츠트라미네, 뮈스카, 실바네흐 등 다양한 품종의 화이트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도멘 오스테흐탁은 1966년, 현재 주인인 앙드레 오스테흐탁 André Ostertag씨의 아버지 대부터 포도 농사를 시작하여 80년대 초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앙드레 오스테흐탁씨는 어린 시절 20세기 초현실주의의 대표 시인 폴 엘뤼아르 Paul Éluard를 사랑하던 소년이었다. 원래 아들들이 그러하듯 그도 아버지가 하는 구닥다리 포도 농사는 싫다며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예술가들의 학교 그랑제꼴에 입학하길 원했다. 사실 그랑제꼴은 공부를 잘해야만 갈 수 있었는데 고등학교 수학시험에서 빵점을 받은 오스테흐탁씨는 그제야 현실과 타협을 하고 부르고뉴에서 와인 양조 공부를 하러 떠나게 된다.
1980년 초, 불과 21세의 젊은 나이에 가업을 물려받은 오스테흐탁씨는 가장 먼저 아버지 때의 방식을 다 버렸다. 농사지은 포도를 네고시앙에 파는 대신 양조 시설을 갖추고 자기 이름을 건 와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알자스의 대형 나무통 대신 스테인리스 발효 통을 들이고 자연과 사람과 와인이 공존할 수 있는 유기농 농법을 실험했다. 포도 품종에 따라 알코올 발효부터 숙성까지 부르고뉴산 작은 오크통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와인 찌꺼기와 함께 천천히 숙성시키면서 부드러운 산도와 함께 떼르호와를 충실히 표현하는 와인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도멘 오스테흐탁은 14헥타르 규모의 80개의 작은 포도나무 정원을 경작하는 와이너리이다. 오스테흐탁씨는 별나게도 자신의 포도밭 Vignoble을 “작은 포도나무 정원 Petits Jardins de vignes”이라고 이야기한다. 포도밭 혹은 포도 농사라고 하면 뭔가 대량 생산적이고 상업적인, 공장식 찍어내기의 기분이 들어 싫단다. 21세기에도 고집스럽게 손으로 모든 작업을 하는 그에겐 자신의 포도밭은 구석구석까지 손길이 닿은 작은 정원인 셈이다.
< 사진 2. 도멘의 안주인 크리스틴 콜랭의 작품이 걸린 테이스팅 공간 >
도멘 오스테흐탁의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작은 갤러리처럼 여기저기 포도나무를 주제로 한 그림들이 걸려있다. 와인 라벨에도 마찬가지이다. 춤을 추는 포도나무, 떼르호와, 하늘과 자연을 그린 그림은 오스테흐탁씨의 아내 크리스틴 콜랭의 작품이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와인 양조가와 그림 그리는 아내의 조합은 그들의 와인 만큼이나 로맨틱하게 다가온다.
사실 알자스의 화이트 와인은 옆 동네 독일 와인과 비교해 가성비에서 밀린다고들 이야기한다. 나 역시 산도는 강하고 단순한 모습에 당도가 있는 알자스 스타일의 화이트 와인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던 중 2015년 초 필자가 한창 보르도에서 와인 공부하던 시절 우연히 도멘 오스테흐탁의 리에슬링을 블라인드 테이스팅 하면서 그간의 편견이 싹 사라졌다.
한 모금의 와인에 눈이 번쩍 뜨이고 머리 위에서 한 줄기 빛이 떨어지는 혀르가즘의 절정을 느꼈다. 와, 알자스에서도 이런 와인을 만드는 곳이 있다니. 그때의 그 부드러운 산도, 흐드러진 꽃향기, 향긋한 과실 향과 버터 향, 땅의 기운과 우아한 모습은 아무래도 평생 잊을 수 없을 듯하다. 그것은 도멘 오스테흐탁의 그랑 크뤼 먼취베흐그 Grand Cru Muenchberg의 리에슬링 2012년이었다.
< 사진 3. 방문 중 시음한 10종의 와인 >
이번 도멘 방문에서 10종의 다른 실바네흐, 리에슬링, 피노 블랑, 피노 그리, 뮈스카, 게붸흐츠트라미네 품종을 테이스팅 했다. 대부분 2016년 빈티지의 와인들로 짧게는 두어달 전 길게는 6개월 전에 병입한 와인들이었다.
여전히 도멘 오스테흐탁은 스타일리쉬 했다.
젖산 발효에서 비롯된 우아한 산도, 과하지 않은 과실 향, 순수하게 표현된 떼르호와가 각각의 품종의 특징과 섞여 굉장히 모던하고 시크했다.
오스테흐탁씨가 사랑했던 시인 폴 엘뤼아르는 '시인은 영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영감을 주는 자'라고 말했다.
이렇게 멋진 와인을 만들고 있으면서도 아직 와인은 인생에서 두 번째고 시가 가장 소중하다는 오스테흐탁씨는 40년이 지난 지금, 시 대신 그의 와인으로 충분히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임주희 와인 칼럼니스트
jhee120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