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원초적인 욕구에 충실하자!
다다이즘2
파피에 콜레 (papier collé)는 종이 따위를 찢어 붙이는 기법으로 콜라주의 일종이다. 콜레란 풀로 붙인다는 뜻인데, 이 기법을 최초로 쓴 사람은 종합적 입체주의 시대의 조지 브라크(Georges Braque,1892~1963)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다.
그들은 그때까지 현실의 일부를 그림물감으로만 그리던 수법을 발전시켜 1912년경 캔버스에 여러가지 종이를 붙여 미적 효과를 내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이때 신문지나 나뭇결 무늬의 벽지 조각, 차표나 상표 따위의 인쇄물, 판화 등이 사용되었다.
이렇게 물체를 붙이는 것을 통해서, 재현이나 묘사보다는 한층 분명한 현실감이 생기게 되었다. 브라크는 “파피에 콜레와 그림으로 물체와 물체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되찾으려 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파피에 콜레 작품(Georges Braque, The Round Table, 1929)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란 일반적으로 현실적 사물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본래의 용도, 기능, 의미를 현실적 문맥에서 이탈시켜 그것이 놓여질 수 없는 낯선 상황이나 장소와 조합시킴으로 초현실적인 환상을 창조해 내는 기법을 말한다.
이것은 일종의 전위법, 혹은 전취법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사물이 본래의 일상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전혀 다른 의미와 느낌으로 전환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일상적인 의미의 이탈과 새롭거나 낯선 의미와 느낌의 환기를 통해, 그것의 모습들을 바꾸거나 확산시켜 나가게 된다.
데페이즈망의 기원은 낭만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가 보여주었던 이성중심, 이성의 절대성을 거부하는 아방가르드 입장에서 출발해, 낭만주의 작가들은 무한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했다.
그러다가 세계 제1차 이후 발생한 비합리적 속성과 그것을 대처하기 위한 지적 탐구 분위기, 무의식의 탐구, 자동기술법 등과 함께 다다이즘에 의해 시도된 부정 정신과 우연성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데페이즈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데페이즈망 작품(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4)
다다이스트들은 이런 기법들을 통해서 무엇보다 기성의 모든 사회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개인의 원초적인 욕구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들은 이성과 논리가 세계대전이라는 재앙을 불러일으켰으며 유일한 구원의 길은 본연의 감정, 직관적인 것, 그리고 비합리적인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취리히의 다다는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 ·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모든 계획적인 프로그램에 반대하면서, 사회적, 미학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도록 하는 폭발적인 힘을 불러일으키며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
시인 트리스탄 차라의 경우, 시를 불어로 낭송하고, 노래 부르고 지껄이고, 때로는 외침, 흐느낌, 휘파람 등을 섞어가면서 자신의 연기가 돋보이게 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나 북을 울림으로서 내는 소리는 의기소침하게 앉아 있던 관객들을 열광적으로 참여하게도 했다. 이러한 소음 음악은 미래주의에서 도입된 것이다.
차라는 또한 우연의 원리를 사용하여 신문기사를 한 단어의 길이 이상으로 되지 않게끔 가느다란 쪼가리들로 절단하여 그것들을 종이 상자에 넣고 뒤흔들어 흩어지게 하고는 떨어진 낱말들을 다시 조합해서 한 편의 시가 되게 했다.
한편 휠젠백은 몽상하는 듯한 곡조에 따라 박자를 맞추어 가면서 말채찍을 휘두르고 은유적으로 관객들의 엉덩이를 치는 시늉을 함으로서 관객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이런 우연에 의거한 다다이스트들의 제작태도는 이성과 합리에 대한 회의, 부정, 파괴, 즉 반 예술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러한 실험작업이 다다를 이전의 다른 예술운동과 구별시킬 수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스 아르프도 뎃생 작업을 찢어 바닥에 흩어지게 함으로써 작업을 끝내고, 흩어진 종이 조각들 사이에서 우연하게 발생한 표현적인 그림을 발견했다.
한스 아르프, Birds in an Aquarium, 1920
초현실주의 화가인 앙드레 마송은 모래 한웅큼을 양손에 모아 움켜 쥐고서는 준비된 캔버스 위를 무용수처럼 움직였다. 이 자동기술법에 따라 그는 우연에 의한 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앙드레 마송, Automatic Drawing, 1924
이처럼 뜻 밖의 예기치 못한 조합의 우연은 다다로 인하여 예술 영역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된다.
이후, 다다는 다시 1918년부터 독일 베를린·하노버·쾰른 등 세 곳을 중심으로 일어나기 시작해1923년까지 진행됐다. 특히 베를린에서는 R.하우스만, G.그로스, W.메링 등이 주된 예술가였다. 여기에 여류화가 한나 회흐도 가담하였다.
한나 회흐, Indian Dancer, 1930
이 시기 독일에는 전쟁이 모든 것을 고갈시키면서 끝날 줄 몰랐고, 통제는 극심했다. 그리고 미래는 불확실한 환멸과 비판의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독일 다다가 탄생했다.
1917년, 휠젠벡는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돌아온 후, 뷔랜트, 라울 하우스만, 게오르게 그로츠 등과 함께 작은 그룹을 만들었다. 여기서 표현주의, 큐비즘, 미래주의 등을 포함한 예술 현상의 모든 국면을 공격하는 연설과 선언으로써 다다운동을 시작했다.
게오르게 그로츠, 사회를 바치는 사람들, 1926
베를린 다다는 많은 시인이나 미술가를 배출하기보다 취리히 다다가 실험했던 소음 음악과 추상적 음성시 등을 더욱 깊이있게 탐구했다.
베를린 다다의 시각 예술중에 중요한 발명은 사진몽타주였다. 그것은 사진의 단편들을 종이에 오려 붙여 새롭게 조합하여 다시 붙여 만든 것이다.
라울 하우스만, Dada siegt!(다다 승리), 1920
이 기법은 큐비즘의 콜라주에서 유래된 것이다. 하지만, 다다에서는 부조나 입체적 작품을 실현했다는 점이 큐비즘의 콜라주와 다르다. 이것은 다다이스트들과 이후의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이상적 형식이 되었다.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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