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감각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예술로 표현하다
다다이즘3
취리히와는 달리 베를린은 정치적 중심지이었기 때문에, 다다이즘도 혁명적 요소를 갖추고 있었다. 하우스만의 아상블뢰즈(assambleuse:여러 가지 오브제 모음)나 회흐의 포토몽타주(2장 이상의 사진을 붙여 중복인화 ·중복노출 등으로 새로운 시각효과를 노리는 방법) 이외에 그로스의 격렬한 반전시리즈인 ‘이 사람을 보라’ 등이 그 예이다.
Raoul Hausmann, ABCD,1923–24
Hannah Hoch, Bouquet Of Eyes, 1930
‘이 사람을 보라’는 제1차세계대전 중의 군부에 대한 통렬한 풍자와 전후의 황폐, 그리고 다시 권력자로 변해가고 있는 사회 상층계급에 대한 공격을 내포하는 무산계급의 옹호를 그 특색으로 한, 예리한 시각의 소묘집(素描集)이다.
게오르게 그로스의 '이 사람들을 보라' 소묘집 작품
게오르게 그로스 (George Grosz,1893-1959) 는 “나는 이 모든 것을 나 혼자만의 세계에서 살고 드로잉을 하며 지켜보았다”고 말했다. 그는 베를린 다다이스트 중에서도 가장 신랄한 시선으로 부르주아 사회를 풍자하고 억압받는 사람들과 지배층의 모순적 입장을 비판하는 작품을 남긴 작가다.
1914년 그는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전역하면서, 잠시나마 군인이라는 존재의 굴레에서 벗어나 전쟁 전에 자신이 사랑했던 도시 베를린과 과거의 자유,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공포를 담아서 그는 ‘메트로폴리스’를 완성하게 된다.
게오르게 그로스, 메트로폴리스, 1916-17
혼란스러운 사회와 부패한 기득권층을 비판하는 좌익성향의 작품행보를 이어가던 그로스는 1919년 독일 공산당에 가입했고, 다음 해 진보성향의 동료화가들과 함께 신즉물주의(Neue Sachlichkeit) 그룹을 결성했다.
이것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에서 일어난 미술운동으로, 무감각한 사회에 분노를 느끼며 그 분노를 예술로 표현하기를 원하는 작가들의 움직임이었다.
1920년대의 독일은 전쟁으로 얼룩지고 피폐해진 민중을 외면한 채 자신만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지배계급의 탐욕이 계속됐고, 프롤레타리아와 브루주아, 기성귀족층과 공산주의자의 대립으로 인한 혁명과 반혁명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로스를 비롯한 신즉물주의 화가들은 염세주의적 차가운 시선으로 그려진 고립된 인물이나 군상의 초상들을 통해 사회비판적 견해를 표출하고자 했고, 그로스 역시 부패한 사회계급에 대한 혐오감을 그대로 드러낸 과격한 작품들을 제작했다.
게오르게 그로스, 사회의 기둥, 1926
그로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자본가, 성직자, 언론인, 군인계급 등은 하나같이 기형적이고 무능하며 이기적인 추악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게오르게 그로스, Fairy Tale, 1942
돼지처럼 뚱뚱하고 머리에는 똥이 가득한 자본가, 위태로운 현실과는 동떨어진 설교나 해대는 성직자, 머리에 요강을 뒤집어쓴 부패한 언론인, 그리고 이들을 향해 도움을 손길을 내미는 민중에게 총과 칼을 들이대는 군인들, 이 모두가 그로스의 붓끝에서 가차 없이 드러난다.
George Grosz, Berlin Street, 1931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해인 1918년부터 시작된 베를린의 이러한 다다이즘은 1933년까지 지속되었다.
Da Dandy, 한나 회흐, 1919
(다음에 계속…)
유로저널칼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 최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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