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다. 레드 와인을 냉장고에서 꺼내 들고 오면 프랑스 친구들이 아니 왜 레드 와인을 냉장고에서 꺼내 오냐고 화들짝 놀란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렇다. 이 모든 게 다 “화이트 와인과 스파클링 와인은 차갑게, 레드 와인은 실온으로” 마셔야 한다는 상식 때문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기에서 실온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실내 온도”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실내에서 실내복을 입은 상태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온도를 의미한다. 의학적으로는 15도에서 25도 사이를 말한다. 30도가 넘는 여름 실내 온도가 아니라는 뜻이다.
프랑스의 국제 와인 및 포도밭 협회(Organisation Internationale de la Vigne et du Vin)에서 권장하는 와인의 적정 음용 온도를 참고해 보자.
화이트 및 로제 와인 : 10/ 12℃
레드 와인 : 15/ 18℃
스파클링 와인 : 8/ 10℃
디저트 와인 : 10/ 14℃
일반 가정용 냉장실의 온도는 약 4℃인데 냉장실에서 와인 온도는 평균 5분당 1℃씩 떨어진다. 실내 온도 26℃에 보관되어 있던 레드 와인을 권장 음용 온도인 15℃까지 내리려면 약 55분을 냉장고에 보관해야 한다. 전용 와인 냉장고나 서늘한 지하 저장고에 와인을 보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일반 레드 와인도 마시기 한 두시간 전에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red wine glasses 에 마시면 훨씬 맛있다. 화이트 와인의 경우 한나절 정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white wine glasses 마시면 된다. 실내 온도가 높은 곳에서 와인을 마실 경우엔 아이스 버킷 등 다양한 쿨러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그럼 왜 이렇게 와인의 온도에 신경 써야 할까? 간단하다. 이왕 마시는 와인, 더 맛있게 마시기 위해서이다.
온도에 따른 5가지 요소의 변화를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 아로마는 저온에서 닫히고 고온에서 열린다.
- 산도는 저온에서 적게 느껴지고 고온에서 많이 느껴진다.
- 타닌은 저온에서 거칠어지고 고온에서 부드러워진다.
- 당도는 저온에서 적게 느껴지고 고온에서 많이 느껴진다.
- 알코올은 저온에서 적게 느껴지고 고온에서 많이 느껴진다.
< 사진 1. 시원하게 칠링 된 화이트 와인 >
이를 기초로 와인의 종류에 따른 서비스 온도를 살펴보자.
화이트 와인은 일반적으로 레드 와인보다 산도가 높다. 산도가 높은 와인은 시원하게 마시는 것이 좋다. 드라이한 화이트 와인인 프랑스 루아르Loire 지역의 뮤스카데muscadet 같은 품종은 굉장히 가볍고 산도가 높은 특징이 있다. 이 와인을 미지근한 온도에 서비스하면 산도가 너무 높게 느껴져서 코가 시큰거리고 혀가 얼얼하다. 이런 경우 시원한 온도에서 마시면 그 산도가 오히려 청량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화이트 와인 중에서도 산도가 낮은 와인은 상대적으로 온도가 약간 높아도 된다. 아로마가 복잡한 장기 숙성용 와인도 너무 찬 온도에서 서비스하면 아로마가 열리지 않아 "무맛"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특별한 날 고가의 화이트 와인을 애써 준비했는데, 서비스 온도 때문에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으면 억울하지 않겠는가! 이런 와인은 위에서 언급한 가벼운 화이트보다는 조금 더 높은 온도에서 서비스하는 것이 좋다. 로제 와인 역시 화이트 와인과 비슷한 수준에서 서비스하면 된다.
일반적인 레드 와인은 화이트 와인보다 산도가 낮고 아로마는 더 복잡한 편이다. 그리고 탄닌이라는 성분이 있다. 그래서 화이트 와인보다는 더 높은 온도에서 서비스한다. 온도가 올라가면 아로마가 열리기 쉽고 산도는 더 많이, 탄닌은 부드럽게 느껴진다. 가볍게 마시기 좋은 보졸레 누보와 같은 레드 와인은 거의 화이트 와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시원하게 서비스하기도 한다.
디저트 와인은 달다. 엄청 달콤함 케이크를 상온, 미지근한 온도에서 먹는다고 생각해보자. 아, 힘들다. 생각만 해도 달아서 머리가 아프다. 당도는 온도가 낮아지면 덜 느껴진다. 그래서 디저트 와인도 화이트처럼 시원하게 마시면 더 맛있다.
스파클링 와인도 화이트 와인과 같이 시원하게 서비스한다. 스파클링 와인이 뜨뜻해지면 산도는 높게 느껴지고 특유의 아름다운 기포들은 날아가기 쉽다. 미지근하고 김빠진 콜라. 진짜 싫지 않은가. 온도가 차면 기포들은 와인 주스에 잘 숨어 있다가 입안에 머금는 순간 온도가 올라가면 확 살아나서 청량감을 더해준다.
프랑스 소믈리에 학교에 다니던 시절 선생님 중 한 분은 여름에 친구들과 함께 가벼운 로제 와인에 "얼음"을 넣어서 마시는 걸 즐긴다고 하셨다. 와인에 얼음이라, 보통 금기 사항이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친한 사람들과 어울려 가볍게 한잔하면서 너무 심각하게 마실 필요는 없다고 하셨다. 적당히 시원하게 적당히 즐겁게 마시면 된다는 말이다.
와인의 온도를 맞추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다. 어떤 와인이든 마셨을 때 내 입에 맛있는 온도면 된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위의 와인별 음용 온도를 달달 외울 필요도 없다. 소주를 몇 도에 마셔야 맛있는지는 모르지만 뜨뜻한 소주를 마시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배운 적은 없지만 경험에 의해 다 알고 있다. 와인 역시 다양한 경험이 쌓이면 우리 혀가 알아서 기분 좋은 와인의 온도를 말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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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희 와인 칼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