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르 언덕은 속세의 형식적인 삶을 거부하고 진정한 자유를 꿈꾸던 예술가들의 고향이다.
일반적으로 화가들이 있는 낭만의 언덕이라고 생각하는 이곳은 로마인들이 기원전 52년 골족 땅을 정복하고 정착한 시대부터 다양한 신을 모시던 신전이 있었다. 해발 130 미터의 낮은 구릉이지만 사방 100 킬로미터 이내에 이보다 높은 곳이 없으니 이 곳에 신전이 세워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313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카톨릭을 인정하기 이전까지는 박해를 받았는데, 3세기경 파리 초대 주교인’생 드니 Saint Denis’신부님이 카돌릭을 전파하다가 부 주교 두 명과 함께 순교한 장소이다. 이후로 Mont (산)과 Martyre (순교자) 두 단어가 시간이 지나면서'Montmartre’로 불리어졌다.
신화에 의하면, 생 드니 주교님이 자신의 잘린 목을 들고 북쪽으로 6 킬로미터를 걸어가서 돌아가신 자리에 건설한’생 드니 Saint Denis’성당은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12-13 세기에는 전 유럽의 순례자들이 찾아오던 성지이다. 우리나라 여행객에게는 아직 생소한 곳이지만, 프랑스의 왕들과 왕비들이 묻히는 왕실납골당으로 이용되었고, 증축공사를 하던 1240년 세계 최초로 고딕양식이 시작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순교당 Martyrium
언덕위의 처형장까지 오르기가 귀찮은 로마병사들이 언덕아래의’Yvonne Le Tac’길에서’생 드니’주교를 처형한 전설이 알려지면서 순교당이 세워진다. 1096년에 교황청에서 성지 순례지로 지정하면서 전 유럽의 성지 순례자들이 찾아온다. 백년전쟁 당시에 미치광이가 되어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샤를르 6세 Charles VI’가 종교의 힘으로 병을 고쳐보고자 순례를 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1611년 순교당 건물 지하에 납골당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옛날의 본래 지하 묘소가 발견 되면서 더더욱 순례지로 중요성을 인정 받았고, 파리의’노트르담 대성당’의 성직자들은 매년 이곳까지 순례를 하고 있으며, 파리의 주교는 주교전을 거행하기에 앞서 이곳에서’생 드니’신부의 순교를 추모하는 미사를 드릴 정도로 중요한 장소이다.
정작’몽마르트르 언덕’의 낭만과 명성 때문에 이 언덕을 꼭 올라가서 화가들의 광장, 성심 성당과 거리의 예술가들을 보고, 바가지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낭만을 이야기하고 프랑스 문화를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이 언덕의 유래가 되고 12 세기 전 유럽 카돌릭 신자들에게 성지 순례지였던 순교당은 우리나라 관광객이 그냥 지나치는 곳.
성심 성당 Basilique du Sacre Coeur
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성심 성당’은 프랑스에 거의 유일한 비잔틴 양식의 건축물로서, 종교적인 목적보다는 호국적인 성격을 띄고 건설된다.
부국강병정책을 펼쳤던 철의 재상’비스마르크’의 프러시아와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격돌한’보불전쟁’이 1870년 발발하는데, 8만 대군을 거느린’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허무하게 항복한다. 하지만, 황제의 항복 소식을 접한 파리 시민들이 승복하지 않고, 무정부 상태의’파리 꼬뮌’으로 70일간 최후까지 항쟁하던 시민군들을 프랑스 정부군이 토벌하는 비극이 발생한다.
고려시대에 잦은 몽고의 침입을 막아보고자 제작한 팔만대장경을 제작한 것처럼, 이 비극적인 사건을 기리고 프랑스의 번영과 안녕을 염원하는 의미로 성도 40 만명이 보낸 성금으로 성당을 건설한다.
프랑스 남부 지방‘뻬리그 Perigueux’의‘생 프롱 Saint Front’성당을 모방한 건축가‘아바디 Abadie’의 설계로 1876년 착공하여 1914년에 완공하였지만, 제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축성식을 치루지 못하다가 전쟁이 끝난 1919년에 성대한 축성미사를 갖는다.
카돌릭을 장려하고 신실한 신자로 십자군 전쟁에 2번이나 참가한’생 루이 Saint Louis(루이 9세)’의 동상과, 백년 전쟁 당시에’샤를르 7세’를 도와 영국군과 싸웠던’쟌 다르크’의 동상이 이 성당의 호국적인 성격을 대변해준다. 하늘의 권세를 위임 받은’쟌 다르크’의 칼날은 하늘을 향하고 있고, 지상의 권세를 가진’생 루이’왕이 오른손에 쥔 칼날은 땅을 향하고 있는데, 왼손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머리에 썼던’가시 면류관’형상이 들려져 있다.
왕이 거액을 주고 구입한 예수의 면류관은 현재,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 보관되어 매월 첫 번째 금요일 오후 3시에만 공개하는데, 시간이 허락된다면 주교가 들고 있는 면류관에 신자들이 입을 맞추며 감격에 흐느끼는 성스러운 행사에 참석해 보시길 추천드린다.
수녀원 Abbaye de Montmartre
1133년’루이 6세’때에 건설한 수녀원은 몽마르뜨르 전체를 차지하고 막강한 교권을 행사하였지만, 대혁명 때 수녀 원장이 처형되면서 모든 토지는 국가로 귀속되고, 지금은 벽돌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에서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다.
베드로 교회 Eglise de Pierre
주변 100 km에서 가장 높은 언덕은 일찍이부터 신성시되어 신전이나 이교도의 제단들이 들어선다. 기원전 55년경에 골 땅을 점령한 로마인들이 초기에는 카톨릭을 박해하며 자신들의 다양한 신들을 모시는 신전을 세운다. 다양한 식민지를 하나로 통합하기 위하여 카톡릭을 국교로 공포하고, 바로 이 곳에’베드로 성당’을 건설한다.
‘파리 꼬뮌’ 시절에는 봉제 공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단다.
안완기 프랑스 테마여행, ‘알고가자’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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