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낮달의 시간
"여기 있잖아. 그게 얼마나 근사한 계획인데. 난 언제든 해병의 해자만 들어도 심장이 콩콩 뛴다고. 우리 해병전우회는 다른 조직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대개의 단체들은 학연이나 지연으로 꾸려지는데 우린 그런 데와는 질적으로 다르지. 팔도에서 모인 진짜 사나이들이 목숨을 걸고 뭉친 거니까.”
"참나, 위대한 해병 한 분 탄생하셨네. 그리 멋진 일이면 제대하지 말고 아예 말뚝을 박지 그래?”
정아가 뾰로통한 얼굴로 대들었다. 그도 지지 않고 검지를 세워 와이퍼처럼 흔들었다.
"마음이야 굴뚝같지. 나도 그러고 싶은데 사병은 장기근무가 불가능하거든.”
"오빠! 농담 그만하고 좀 진지하게 말해줘.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뭐야.”
짜증이 섞인 정아의 말투에 그가 잠시 말을 끊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음... 우선 제대하면 복학을 해서 전공 공부에 매진할 생각이야. 일본어를 모국어에 버금갈 정도로 익히는 거지.”
"그거야 당연한 거고.”
"그렇게 실력을 갖추고 졸업한 다음 한일 양국의 우호증진에 이바지하는 거지.”
"어휴, 내가 말을 말아야지. 이건 뭐 잠자리채로 뜬구름을 잡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그만하자. 들어갈 시간 다 되었어.”
정아가 찌푸린 표정으로 전광판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가 주머니에서 휴가증과 항공권을 꺼내들었다. 그러고는 손을 흔들며 검표원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다 갑자기 몸을 돌리더니 순식간에 정아를 껴안고는 입술로 입술을 더듬었다. 주변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는 느낌에 정아는 황급히 그를 밀쳤다.
그는 같은 과에 1년 먼저 입학했지만 중간에 군대를 다녀오느라 졸업은 정아보다 1년이 늦었다. 첫 휴가를 나왔다가 분식집에서 우연히 선후배로 조우한 이후, 그는 귀대하자마자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이러다 지치면 그만 두겠지 싶어 답장을 하지 않았는데, 그러는 사이 학과의 편지함은 온통 그가 보낸 편지로 가득했다. 그러다 보니 정아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과에서는 자연스레 두 사람을 캠퍼스 커플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그 여파가 곳곳에서 감지되어 정아를 힘들게 했다. 정아가 어쩌다 미팅 자리에라도 나가려고 하면 그의 친구나 후배들이 나서서 교묘하게 훼방을 놓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참 이상했다. 처음에는 편지가 와도 그러려니 하고 지나쳤는데 어쩌다 한 번 두 번 답장을 보내다 보니 나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편지함 부근을 배회하게 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아는 편지를 읽는 재미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루에 한 통은 기본이고 어떤 날은 세 통까지 올 때도 있었다. 정아가 보기에 그걸 전부 그가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쓰는 문장은 무미건조한 편인데 가끔 어떤 편지는 상당한 내공이 걸린 문장력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아가 근 50통 정도의 편지를 받고 처음으로 답장을 쓴 것도 사실은 그걸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무모한 편지질에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후배들을 이용하지 말라는 경고 메시지를 담아서 보낸 답장. 그런데 그것이 그의 전투력을 자극하는 촉매가 될 줄이야. 이후 편지의 양이 훨씬 많아졌다.
마침내 그가 팔각모를 벗고 학교로 돌아왔다. 편지의 힘은 대단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학교에서나 거리에서, 영화관에서, 주점에서, 더러는 도서관으로 이동하며 바늘과 실처럼 가까워졌다. 그러는 동안 정아는 그에게 입술과 가슴까지는 허락을 했으나 그 다음의 상황은 철저하게 막아냈다.
그가 축구장을 자유자재로 누비는 상대팀 공격수라면 정아는 골문을 굳건히 지키는 키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수시로 기회를 만들어 회심의 슛을 날려댔고 정아는 그걸 침착하게 막아냈다.
지금 생각해도 첫 골을 내준 것은 커다란 실수였다. 그는 늘 힘을 내세워 정아를 단번에 압도하려 했다. 정아는 그게 해병대에서 배운 버릇이겠거니 생각을 하면서,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고 버텼다. 그는 군인정신에 따라 초전박살이라든가 임전무퇴 따위에만 길들여져 있어서 사랑을 무슨 전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랑은 사탕을 먹듯 해야 한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사탕은 일거에 깨먹는 것보다는 혀를 굴려 녹여먹어야 한다는 걸 말이다.
그날도 그는 하프라인에서 골 박스 앞까지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들어왔다. 정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저 속도라면 곧 숨이 차서 헐떡거리다 제풀에 지쳐 헛발질을 할 것이 분명해보였기 때문에. 그런데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무섭게 돌진하던 그가 슈팅을 날려할 지점에 이르러 갑자기 속도를 줄이고 딴청을 부렸다. 그는 볼 트래핑을 멈추고 어슬렁거리더니, 벽에 걸린 시계도 보았다가, 한숨도 쉬었다가, 웬걸, 경기를 포기할 것처럼 돌아서서 하프라인으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궁금해진 정아가 잠깐 긴장을 풀고 한눈을 팔았던 것일까. 바로 그 눈 깜빡할 사이에 그가 미끄러지듯 잽싸게 골문을 파고들었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정아는 입을 하 벌린 채 망연자실했다.
정아는 자신이 제대로 준비된 키퍼가 아님을 절감했다. 어이없이 한 골을 먹었다 하더라도 다시금 냉정을 되찾아 골문을 단단히 지키는 게 선수의 의무이자 도리인데 어이없게도 그 날만 내리 세 골을 더 먹었던 것이다. 이상하게도 한 번 열리니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정아는 슛을 막아내는 골키퍼의 입장에서 오히려 골문을 열어두고 그의 킥을 기다리는 이상한 골키퍼로 변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가 공을 몰고 들어오는 모습이 멀리서 보이면 짐짓 모른 체 돌아서거나 골문을 비워두는 짓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자진해서 골을 먹는 골키퍼라니!
그러다 결국 은지가 들어섰다. 정아는 그날의 경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은 그가 대학 생활을 끝내며 보내는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그동안 늘 정아의 자취방에서 이루어지던 게임과 달리 그날은 어웨이 경기였다. 처음으로 그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식구가 모두 성당에 자정미사를 보러간 틈을 노려 그가 만든 이벤트였다. 정아의 자취방에서 이루어지는 홈경기는 옆방 다른 자취생의 청취권 내에 있기에 항상 조심스러웠다. 가끔 그의 화려한 개인기에 휘둘려 정신이 아득할 정도가 되어도 소리 한번 제대로 지를 수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완벽한 방음에다 신경 쓰이는 그 어떤 방해물도 없는 경기라니. 최적의 조건이었다. 정아는 슈팅의 강약과 강도에 따라 몸부림치며 마음 놓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일까 그도 평소보다 훨씬 화려한 개인기를 선보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러다 그가 마침내 화려한 기술로 마지막 슈팅을 골문에 꽂았다. 되돌릴 수 없도록 깊이 들어간 골이었다. 정아는 속으로 만세를 부르며 환호했다. 미리 배란일을 계산해두었기에 골 부담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날짜 계산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것을 다음 달 생리가 없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도 그가 칼에 찔려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말이다.
후문을 빠져나온 정아는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큰길 쪽으로 걸었다. 길가에 늘어선 플라타너스며 은행나무의 가지에 하오의 햇살이 비스듬히 걸려있었다. 보도에 입간판을 내놓고 영업 준비를 하고 있는 카페와 횟집을 지나자 저만치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정아는 버스정류장 나무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었다. 사선으로 날아온 햇살이 눈을 찔렀다. 정아는 눈을 감고 해를 바라보았다. 오랜 만에 맛보는 이 따스한 평온. 언제였더라. 바로 이 자리에 앉아 그를 기다리던 때가. 그날도 이처럼 길게 드리운 햇살에 눈이 부셨었다. 곧 버스 한 대가 달려와 다급하게 멈췄다. 정아는 눈을 뜨고 버스의 문을 바라보았다. 뜬금없이 내리는 승객들 사이에 그가 끼어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다시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가끔씩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불쑥 불쑥 찾아오는 그. 그 때마다 습관처럼 밀려드는 회한에 가슴이 아렸다.
집으로 가는 버스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정아는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이따 저녁에 뵈었으면 해요.”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