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의 프랑스이야기

테오가 걸으며 이야기 하는 서사시와 같은 프랑스 - 옥시따니

by 편집부 posted Nov 11,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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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오가 걸으며 이야기 하는 서사시와 같은 프랑스 - 옥시따니



 테오01.jpg백작성 Chateau Comtal


12세기 베르나르 아똥 트랑까벨(Bernard Aton Trencavel)이 후작들의 궁전으로 건축했다. 백작성은 1226년 프랑스 왕국으로 편입되면서 갈리아 로마 시대의 성채에 기대어 지어졌다. 성벽을 사이로 해자가 건설되고 진정한 내부 요새가 만들어 진다. 



쌩 나제르 성당 Basilique Saint Nazaire


성당은 중세 씨떼의 성벽 가까이 지어졌다. 6세기 교회 터에 처음 교회가 세워지고 현재의 교회는 1096년 건설이 시작된다, 교황 우르비노2세가 작업장을 강복하였으며 1130년 완공된다. 1269년 확장공사가 있었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가대석은 고딕으로 바뀌었고 측면의 복도도 1300년에 손을 보았다. 예산 부족으로 중앙 예배석은 로마네스크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게 되었다. 남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 유리창을 간직하고 있다. 






테오02.jpg

까르까쏜느의 전설

사진-까르까스 여인의 초상


전설에 따르면 샤를마뉴와 전투에서 회교도 발락 왕이 죽은 후 여주인 까르까스 부인이 씨떼 성을 방어하며 버티다 식량이 떨어지자 성안에 돼지들에게 남은 식량을 다 먹이고 기름지게, 살찌게 한 연후에 성밖으로 내몰자 밖에서 성을 포위하고 있던 샤를르마뉴의 군대가 잡아 배를 갈라보니 먹이가 가득 찬 것을 보고 철수하고 떠나게 된다. 


이에 까르까스부인이 종을 쳐서 불러들여 화해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에 따라 마을 이름을 까르까쏜느라고 부르게 되었다.







몽벨리에 Montpellier 


 테오03.jpg지중해의 밝은 빛에 고요히 잠든 도시 몽벨리에는 시내 Intra Muros 28만(2018년) 주민이 살고 있는 옥씨따니 두 번째 대도시다. 

인구 수로 프랑스 8대 도시이다. 주변도시 인구까지 합하면 44만명에 이른다. 옛 도시에는 오페라, 연극장,박물관 그리고 아름다운 공원들이 매력을 준다. 바다 향기를 머금은 공기는 바로 바다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느낌을 준다.


도시에 이름은 Mons Puellarum 에서 왔다고 하며 또 다른 번역은 젊은 여인들의 산 mont des jeunes filles에서 유래 한다고 한다. 이 도시는 프랑스와 트뤼포 감독의 "여인들을 사랑한 남자"라는 영화로 더 유명해 졌으며 몽벨리에 여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명성을 얻었다.

도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하는 985년 멜글리 백작이 자기 휘하의 기사에게 이 땅을 기증하였다. 당시 이 지방에 이미 유태인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1140년 아라곤 왕국에 속한 이 도시는 이방인들에게 열린 땅이었다. 알모하드의 박해를 피하여 안달루시아 유대인들은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다. 당시 랑그독 지방은 예배의 자유와 종교적 축제를 허용하였다. 그리고 유태인 결혼을 인정하고 소유권을 허용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 지방에는 거대한 유태인 공동체가 형성 되었다. 


12-13세기 지중해의 동양과 향신료 무역으로 도시가 발전했다. 12세기부터 이 도시에는 의과, 법과, 예술 학교가 있었다. 1220년 설립된 대학은 13세기 말 1289년에 몽벨리에 대학 설립 헌장이 교황 니콜라이 4세의 교서에 나타나 공식적인 대학의 지위를 얻는다. 

중세에는 대학의 도시로 이름을 알렸고 스페인에서 쫓겨난 아랍인과 유태인 의사들이 몽벨리에 대학에 자리 잡으며 의과 대학은 전 유럽에 이름을 높였다. 2015년 몽벨리에 대학은 7만명의 학생이 등록하고 있다. 


테오04.jpg


왕 필립 르 벨은 반 유대적인 법령을 선포하여 유대인 추방령을 내린다. 이 들은 카탈로니아와 프로방스 백작령으로 피난을 가게 된다.

1349년까지 마요르카에 소속된 땅을 발르와 왕 필립 6세가 구입하여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었다.  

1529년 노스트라다무스가 몽벨리에 의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1530년 인문주의자 소설가 라블레가 이곳 의과 대학을 졸업했다. 종교 개혁 시기에는 신 구교가 교대로 지배했으며 루이 13세와 14세에 이르러 신교도는 세벤 지방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테오05.jpg

몽벨리에 개선문 L'arc de triomphe de Montpellier   


루이 14세의 영광과 왕권의 권능을 상징하기 위하여 축성된 기념비다. 

72년간 프랑스를 지배한 루이14세의 통치에 바쳐진 개선문은 1691년 랑그독 지방 건축가 다빌레가 설계하였다. 개선문 위에 루이14세의 기마상이 올라가기로 계획안에는 있었다. 

높이 15 m 넓이 18 m 이며 출입 아치의 폭은 4,70 m 높이 7 m에 이른다.       






 유로저널 칼럼니스트 테오

bonjourbibl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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