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우와 함께하는 와인여행 (7) -
하늘여행과 보졸레누보 (Beaujolais Nouveau)
'시장 친화적 마케팅 '을 적절히 잘 활용해, 전세계 대중적 수요를 늘리는데 성공한 와인, 그이름,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
20세기 항공 산업 발달과 더불어, 1985년 미테랑 정부 시절, 11월 셋째주 목요일에 일제히 판매 개시하라는 법을 공포한 이래로, 프랑스 국영 항공사인 에어프랑스(Air France)비행기 카고(cargo)에 실려, 보졸레누보는 세계 방방곡곡에서 소비자들을 만나게 되었다. 한동안 어린왕자가 조종하는 에어프랑스 비행기에 보졸레누보가 가득실린 그림이 선전용으로 배포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와인으로 태어났지만, 여행을 숙명처럼 받아들어야 하고, 장기간 저장할 수 없어 때가 되면 사라져야하는 (11월 셋째 목요일부터, 다음해 부활절까지 소비됨)유한성을 지닌 특이한 운명의 소유자, 진정한 와인 여행자라고 그를 칭하고 싶다.
대부분, 와인을 항공기에 실어 먼 곳으로 보낸다는건, 그 와인이 지닌 장점이 어느정도 삭감될 수 있다는 것을 감수하는 작은 모험이다. 그 와인들이 비행을 하기 전의 컨디션을 회복하려면, 적어도 2주 정도는 안정을 시켜주어야 한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서 미국을 가게 되면, 열 두 시간이 넘는 시차때문에 우리 몸이 쉽게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처럼. 비행기에서 일하던 시절, 처음에 가장 힘들었던 건 다름 아닌 시차 적응이었다. 화려한 도시의 쏟아지는 불빛들, 유서깊은 역사적 건물들, 맛난 음식도 그다지 유혹적이 않았고, 휴식만큼 달콤했던 건 없었다. 비로소 몸이 제 기능을 회복하고 나서야 그것들이 아름답게 다가왔다.
이런걸 보면, 와인은 참 사람과 많이 닮았다. 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 담겨진 포도로 만들어진 액체에 불과하지만, 시간의 흐름, 장소의 변화등 외부적인 영향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명체이다.어제의 와인이 다르고, 내일의 와인이 다르다.
소위 말하는 그랑 크뤼(Grands crus) 고급 와인들은, 자기들이 태어난 곳, 햇빛이 잘 들지 않은 어둡고 서늘한 꺄브(cave)에 유유자적 누운채로 세계 각국에서 알아서들 찾아오는 그들의 애인들 (와인 애호가)을 영접한다. "당신이 날 원한다면, 직접오세요. 나 여기 있다고 !"라고 하는듯 약간은 우쭐한 느낌으로, 마치 루브르의 철통보안 유리 액자 안의 모나리자처럼 약간은 도도하게.
모든 항공사에서 이 계절에 다 보졸레누보를 서비스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일하던 비행기 안에서는 해마다 이 시점에 보졸레누보를 서비스해왔고, 11월이 되면 내심, 올해 보졸레누보의 맛은 어떠려나 은근히 기대하곤 했다. 그 시절 나에게, 보졸레 누보는 한 해가 거의 다 가고 있으니 일년 동안의 나를 돌아보라는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보졸레 누보가 박스채로 실리면, 그때부터 비행기 안에서는 승무원들의 일사불란한 손놀림이 시작된다.즉, 햇와인인 보졸레누보를 신선한 온도인 12도에 맞추어 손님들께 제공해야하므로, 비행기라는 한정된 좁은 서비스공간을 잘 활용해서 와인을 차게 할 수 있는 공간과 물건들을 잘 확보해야만 만족한 서비스를 할 수 있었다.
겔리(gally)라고 일컫는, 승무원들의 작업 공간 한 쪽에 췰러(Chiller:음료나 음식물의 온도를 차게 유지시켜주는 장치)는 잘 작동하고 있는지, 드라이 아이스나 얼음은 넉넉하게 실렸는지, 빠른 시간 안에 온도를 상온(15-18도)보다 낮은 보졸레누보 서비스 온도에 맞추려고 드라이 아이스를 와인병에 직접 갖다대고 제때 제거하지 않아 와인이 얼어버리는 경우도 심심챦게 있었다.
와인의 온도를 적절히 맞추는 일은 안전업무 다음으로 참 중요한 일이기도 했지만, 지상과 다른 하늘 안의 작은 공간안에서는 마냥 쉽지만은 않은 업무이기도했다.
보졸레누보는 비행기안에서 즐기기에 참 좋은 와인이다. 화강암과 석회질이 공존하는 토양에서, 가메(gamay)라는 포도로 만들어진 이 와인은 ,다른 적포도주에 비해서 탄닌감이 적고, 가볍다. 와인에 관해서 잘 몰라도, 쉬운 접근을 허용한다. 심각하게 이거저거 따져가며 마시는 와인이 아니다. 알콜도수도 그리 높지않아서, 지상에서보다 취하는 속도가 3배나 빠른 기내에서 마시기에 조금은 안전한 측면도 있다. 또한 산도가 강하게 느껴지는것은 더욱 아니다.
어차피 기내에선 미각도 둔해지므로, 세부적인 미각을 지상에서처럼 세밀하게 느끼는건 불가능에 가깝다. 비행기 안에서는 조금만 먹어도 장기들이 부풀어올라, 지상에서보다 속이 더부룩해지기 쉬운데, (그래서 승객들은 식사서비스가 끝나면, 소화제나 탄산음료를 많이 찾곤하였다.) 이 와인은 탄산가스 침용방식 (macération carbonique)으로 만들어지는 까닭에, 탄산가스의 뉘앙스가 살아있어 (boisson gazéifiée )비행기 안에서 더부룩해진 속을 나아지게하는 느낌도 준다. 이 와인, 여러모로 참 '비행 친화적'이다.
일단 색깔은 투명하게 가벼운 붉은빛이며, 코로 느껴지는 아로마는 알이 작은 붉은 체리, 풋풋한 산딸기, 앵두, 붉은 베리(berry)계열의 신선한 과일향이다.
수년전 한국의 어느 백화점 갤러리에서, 나탈리 레테(Nathalie Lété)라고 하는 젊은 작가의 전시회를 본 적이 있다. 8월달 쯤 이었다고 기억하는데, 후덥지근, 온도와 습도가 동시에 높은 견디기 힘든 여름 날씨, 그리고 수 많은 도시의 사람들을 피해 잠시 휴식이나 취하려고 들렀던 그 곳에서, 잘 췰링(chilling)된 한 잔의 보졸레누보를 맛본듯한 감흥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의 그림들은 , 마치 어린아이들이 행복한 마음으로 크레파스로 스케치북에 그림일기를 쓰듯이 자연스럽고, 신선했으며, 순수하고 맑은 느낌을 주었다.심각하지 않았고, 기분 좋은 가벼움을 느끼게 했다. 눈이 크고, 귀가 쫑긋한 토끼가 호기심에 어린듯 숲속을 두리번 거리는 모습이라든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같은 머리에 리본 묶은 귀여운 소녀가 빨간 꽃들과 커다란 버섯이에 둘러싸인채 뭔가 의문의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림, 동화에서 막 튀어나온 분홍 드레스 입은 공주님이 나뭇가지에 서서 꽃을 따려고 하는 장면 등등.
어찌보면, 무겁고 탁한 색들과 재료를 사용해 공포스런 그로테스크함을 연출할 법도 한데,(독버섯에 앉아있는 소녀, 비이성적인 거대 토끼, 가는 나뭇가지를 밞고서도 잘 서있는 육중한 드레스를 입은 여왕)나탈리 레테라는 작가는 위트와 간결함으로 청량하게 풀어냈다.
내가 생각하는 보졸레누보는 나탈리레테의 그림들 같아야한다.
어린 와인, 햇와인, 그해에 수확해서 다음해 부활절까지 소비를 끝내는게 가급적이면 좋은 이 와인이 만약에 높은 온도로 서비스 된다면? 애석하게도 어린 와인의 생명과도 같은 프레시함(fresh)을 잃게 될 것이고, 작은 알갱이로 된 붉은 과일향도 나뭇잎이나 어린 식물 줄기의 아로마로 변해버릴 것이다.
또 한가지, 보졸레누보의 중요한 후각적 특징의 하나로, 바나나, 봉봉 엉글레(Bon Bon anglais: 영국 사탕), 약간의 메니큐어냄새(vernis à ongles)등을 들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와인 제조방식 (macération carbonique)에서 받은 영향이 크다. 과육의 손실을 막기위해 손으로 수확한(vendange manuelle)가메 포도를 (gamay) CO2 즉, 이산화탄소가 가득찬 밀봉 큐브안에 포도송이째로 밀어넣는다.
줄기를 제거하거나 포도송이를 으깨는 과정따윈 없다. 산소 없는 밀폐된 공간안에서, 이산화탄소를 포도가 흡수하고, 그 후 효소에 의한 대사과정을 거치며, 세포 내 발효가 포도 내부에서 일어난다는게 이 제조방식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다. 특히 바나나 뉘앙스는 흔히 다른 와인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독보적인 보졸레누보의 향이며, 이 향을 결정짓는건 아세타트 디조아밀(acétate d'isoamyle)이라하는 포도 발효시에 생성되는 에스테르(Esters)계열의 복합물질때문이다.
몇개월 동안의 뉴질랜드 체류를 마치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내게, 친구들의 점심초대는 반가왔다. 두말 없이 우리들은 냉장고에 잠시 췰링해뒀던, 올해의 보졸레누보를 꺼내, 그야말로 막잔에 따라 마시며, 그동안의 회포를 풀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가볍게 친구들과 오후에 한 잔 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잘 어울릴 수 있는 대중적인 와인, 그게바로 보졸레누보다.
" 내게 있어 보졸레누보란,
빨간 구두를 신고, 양갈래 머리를 땋은
호기심어린 소녀 엘리스가
토끼의 손을 잡고, 가지각색의 사탕을 손에 쥔 채,
원더랜드 입구에서서 들어갈까 말까
멈칫거리는 풍경이라하겠다."
(다음에 계속)
서연우
유로저널 와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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