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심원의 영화로 세상 읽기 (32):
피아니스트의 전설(The Legend Of 1900)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Giuseppe Tornatore)
주연: Tim Roth 대니 부드만 T.D. 레몬 나인틴 헌드러드,
Pruitt Taylor Vince 맥스 투니, Melanie Thierry 소녀
개봉: 2002년 12월 6일 이탈리아
전설이 된다는 것은 단순한 삶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전설은 시대적 타고남이 있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전설적인 인물이 되고 싶어 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전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전설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들은 전설이 되기 위해 살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전설의 다른 표현은 다른 사람이 범접할 수 없는 탁월한 삶을 산 것이다. 탁월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오히려 탁월해 지기 어렵니다. 탁월함의 목적이 아닌 치열한 인생을 성실하게 살다 보면 타인에 의해 전설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삶이 전설이 아닌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각자의 삶은 전설적 가치가 있다. 자타가 공인해 주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자신의 삶은 소중할 뿐 아니라 전설적인 가치가 충분히 있다.
전설의 삶을 산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전설이 될 수 있도록 뒷받침 되어준 조연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인생이란 어떻게 보면 전설이 되는 주인공이 되기도 하면서 동시에 누군가를 주인공으로 돋보이게 하는 조연이 돼야 하는 숙명적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영원한 주인공도 또한 영원한 조연도 없는 셈이다. 때론 주인공인 전설적인 존재가 되기도 하고, 때론 주인공을 빛내주는 조연의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모든 인생이 소중하고 존귀하다. 인생을 설명할 때 반추되는 문화적 요소가 필요하다.
그 요소 중에 영화가 갖는 무게는 다른 그 어느 것 보다 크다 할 수 있다. 영화는 어떻게 보면 인생의 삶을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거울이 된다. 영화가 개봉된 이후는 관객의 입장에서 재해석된다. 그렇게 해석된 기준은 자기 인생과 연결해서 해석 된다.
개인에게 주어진 삶은 보편적이면서 특별하다. 통계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면서 보편적이 않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러하다. 보편적이며 평범한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각자의 입장에서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
영화의 무대는 영국과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자를 실어 나르는 버지니아 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의 아버지 ‘피터’는 승객이 모두 내린 후 일등석 식당을 훑으면서 소위 부자들이 흘린 귀중품을 줍는 일을 일상으로 생활하는 사람이었다.
탁자 밑을 기어서 무언가를 줍는 그의 소망은 귀중품 하나를 건지는 거였다. 그런데 그날은 아무것도 떨어져 있지 않았고 그랜드 피아노 위에 바구니가 놓여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간 그에게 들어오는 것은 태어난 지 몇 달이 안 된 백인 남자아이였다.
그 아이로 인하여 인생은 바뀐다. 20세기가 시작하는 날이어서 1900이란 이름과 자기 이름, 아이를 담은 레몬 상자 이름을 덧붙여 긴 이름을 부여한다. ‘대니 부드만 T.D. 레몬 나인틴 헌드러드’ 버지니아호 배에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이다.
아이는 흑인 아버지를 통해 글을 배운다. 주인공이 배운 글은 신문에 실린 기사와 경마의 이름이었다. 그가 배운 세상은 배에서 일어나는 일이 전부였다. 모르긴 해도 그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을 것이다. 미국이라는 새로운 신세계로 입성하기 위해선 갓 태어난 아이가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T. D. 레몬 박스에 아이를 담아 피아노위에 놓아둔 것이다.
아이는 성장하면 피아노를 배우지 않았지만 일등석 고객을 위한 악단의 최고 피아니스트가 된다. 그의 음악은 배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이다. 사람의 인상과 생김새, 걸음걸이 등 모든 것이 악상이 된다. 일등석에서 연주가 끝나면 그가 머무는 곳은 지하층에 있는 하층민들이 이용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의 음악은 완성된다. 그의 음악에는 배와 출렁이는 바다, 거대한 미국으로 부푼 꿈을 안고 이민을 가는 사람들의 희망이 담겨 있다.
그가 추구하는 음악은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핍절할 수 없는 독특한 맛을 품고 있다. 19세기 말에 시작된 재즈 음악을 만든 장본인이 그의 소식을 듣고 배에 올라 대결을 펼친다. 지상에서는 최고였던 피아니스트였지만 배안에서 그의 음악은 오히려 우물 안의 개구리 같은 음악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세월이 지나 버지니아호는 파선을 해야 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나인틴 헌드러드의 절친이었던 트럼펫 연주자인 ‘맥스’는 파선하는 배안에 홀로 남은 친구를 찾아 배에서 내리길 권면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오직 한길이었다. 배에서 태어나, 배에서 성장했고, 배에서 인생의 전성기를 보냈기에, 배가 전부인 인생이기에 배에서 생을 마감해야 하는 것이 그의 인생철학이었다. 배에서 내려 세상을 향해 음악을 펼친다면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만큼의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배안에서 고착되어 있었다.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라는 이름을 남기고 그는 배와 함께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인생이다. 배는 인생을 표현해 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인생은 태어나면서 누구나 내릴 수 없는 배를 타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그 항해가 바로 인생인 셈이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언제가 이 배에서 내리게 되면 꿈의 도시인 미국과 같은 신세계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된다.
그런 꿈을 꾸지 않을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언젠가 그 꿈이 이뤄지기를 기대하면서 때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배안의 세계가 인생자체임을 말하고 있다. 물론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견일 수 있다.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관객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견의 해석이라 할지라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속고 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가장 앞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존재임은 분명하다. 언젠가 주어질 그 기회를 기다리다 현실이라는 배의 움직임을 잃지 못하고, 그 안에서의 삶을 배우지 못한다. 배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다. 각자의 꿈을 가지고 인생을 시작한 셈이다. 배가 항해하는 것에는 순탄할 때도 있겠지만 목숨을 위협할 만큼의 성난 파도와 맞닥뜨릴 때도 있게 된다.
배안에서 익숙하도록 배우고 적응하지 않는다면 그 풍랑으로 인하여 인생의 쓴맛을 경험하게 된다. 트럼펫 연주자인 ‘맥스’ 역시 요동치는 배안에서 멀미와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간다. 자기인생의 길을 잃어버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릴 때 요동치지 않는 존재로 나타난 사람이 주인공이다. 흔들리는 배안에서 초연한 법과 자기가 추구하는 것의 중심을 잃지 않는 인생을 배운다.
그런 인생을 산다는 것엔 방도가 없다. 배안에서의 삶을 즐기면서 그것이 자기 인생임을 받아들이면 된다.
인생은 주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 인생은 그렇게 한걸음씩 개척해서 완성하고, 그 완성은 다시 미완성이 되어 더 나은 완성을 향해 항해하는 배와 같은 것이다. 그렇게 가장 천한 인생으로 시작했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 전설로 남게 된다. 버지니아 호는 배가 아니라 인생이다. 모든 인생을 태운 배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인생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독립적인 인생이다.
꿈을 찾아 떠나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그 삶 자체가 꿈인 인생이 있다. 꿈은 미래에 정착할 그 땅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배 안이 완성된 꿈의 현실이 된다. 그 누구도 판단할 수 없으며 판단 받지 않을 만큼의 완벽하고도 숭고한 인생의 역사를 써내려간다.
배안에서는 영원히 살수 없다. 주어진 시간에만 존재해야 하는 유한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배가 흔들릴 때 흔들림을 불평하지 말고 그 흔들림에 자신을 맡기면서 인생의 거룩한 질주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주인공 ‘나인틴 헌드러드’를 통해서 이야기 하려는 것은 배라는 세상은 흔들릴지라도 주어진 삶은 흔들림 없이 그 흔들림에 영향 받지 않고 살아갈 때 비로소 삶은 전설이 된다.
박심원 유로저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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