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을식의 장편 연재소설

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92) - 바람의 기억

by 편집부 posted Dec 17,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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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을식의 장편 연재 소설 (92) - 바람의 기억


7. 꽃비의 계절
발을 동동거리던 정아가 허리를 깊게 굽혔다. 영미도 팔짝거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상기된 정아의 얼굴을 장 마담이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동안 잘 적응했고 실적도 기대 이상이었다. 그래서 내가 회장님께 간청해서 겨우 받아낸 휴가니까 뒤탈 없이 잘 다녀오너라. 무슨 말인지 알지?"
장 마담이 정아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네, 언니! 살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정아는 기도하는 자세로 손바닥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영미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아유, 나는 이게 웬 횡재래. 하여간 친구를 잘 둬야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니까." 
"이년아, 너는 내 말을 잘 들어야 떡을 얻어먹어. 하긴 이번에는 정아 덕에 비행기를 타긴 한다만."
장 마담의 장단에 영미가 깔깔거렸다. 정아가 영미의 손을 슬쩍 잡았다. 아무렇지 않게 너스레를 떠는 영미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사실 영미는 지금 자신이 일종의 안전장치로 쓰이고 있다는 걸 빤히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친구를 위해 군소리 없이 장 마담의 지시를 받아들인 것이다. 
장 마담이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정아에게 건네며 말했다.   
"글씨 보이지? 회장님이 직접 보내주신 금일봉이다. 이런 파격은 우림각 개업 이래 처음 있는 일이야. 어른께서 널 얼마나 아끼시는지 짐작이 되지?"
와, 대박!, 영미가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정말 받아도 되나요? 너무 죄송해서... 어머니께 잘 전해드릴게요."
정아는 어머니가 편찮으시다고 거짓말을 한 게 마음에 걸렸다. 그 때문일까, 얼굴이 가을 사과처럼 붉어졌다.
"준비해서 빨리 출발하도록 해라."
장 마담이 어서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정아와 영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허리를 접었다. 
두 사람은 우림각을 빠져나와 백화점을 향해 걸었다. 그쪽 골목에 여행사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 지금 기분 째지기 직전이야. 이 몸이 드디어 비행기를 탄단 말이지."
느닷없는 얘기에 정아가 입을 삐죽이며 눈을 흘겼다. 
"진짜라니까! 옛날 학교에서 뱅기 타고 수학여행 갈 때 난 쩐이 없어 집에 남았거든. 씨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솔직히 그땐 우리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슬펐다."
 정말 비행기를 못 타본 모양이구나, 정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난 지금 여권이 없는데 비행기 탈 수 있나?"
영미가 뭔가 깜빡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아가 정색하며 대꾸했다.
"어머, 그건 안 되지. 넌 못 가겠다."
순간 영미가 정아의 어깨를 주먹으로 갈겼다. 
"햐, 이 가시나, 눈도 깜짝 안하고 사기 치는 것 봐라. 아무려면 내가 국내선과 국제선도 구별 못하는 줄 아나?"
정아가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여행사 직원이 내일은 좌석이 있다고 상냥하게 말했다. 정아는 가는 표 석 장과 돌아오는 좌석 둘을 예매했다.   
집으로 돌아온 정아는 은지 짐부터 챙겼다. 동화책과 장난감, 당장 입을 옷가지를 차곡차곡 가방에 담았다. 가져갈 짐을 절반도 넣지 못했는데 가방은 이미 복어 배처럼 불룩해졌다. 고심하다 나머지 짐은 나중에 택배로 보내기로 했다. 
짐 정리에 이어 청소를 끝낸 정아는 은지를 앞세우고 집을 나섰다. 바람이 불 때마다 길가의 벚나무에서 우수수 꽃비가 내렸다. 어떤 곳은 떨어진 꽃잎이 보도를 하얗게 덮어 마치 눈이 쌓인 것 같았다. 
버스에 오르고 나서야 정아는 아이에게 아빠에게 가는 거라고 말해주었다. 근래 거의 발을 끊다시피 한 양지공원. 그는 늘 그랬듯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정아를 맞아주었다. 아이가 손을 모으고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정아는 눈을 감았다. 자주 오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아이를 멀리 보내게 된 점 이해해 달라고 마음으로 간절하게 빌었다. 
다음 날 아침. 정아는 보일러를 외출로 놓아 단속하고 출입문에 따로 자물쇠를 채우고는 집을 나섰다.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택시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어쩌다 오는 차도 죄다 손님을 태우고 있었다. 합승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어려웠다. 차라리 처음부터 좀 걸어 나가 버스를 탈 걸 그랬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에 한 번뿐인 항공편, 그걸 놓치면 그대로 하루를 잃게 된다. 더구나 내일 표가 없을 수도 있다는 강박감이 더해지자 점점 더 초조해졌다. 정아는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되겠다싶어 버스정류장을 향해 바삐 걸었다. 캐리어의 바퀴 구르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 할머니랑 몇 밤이나 자야 하는 거야?"
은지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물었다. 
"글쎄다, 한 오십 밤?"건성으로 대꾸했다. 
"그렇게나 많이? 잉, 싫은데." 
은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흔들었다. 
"왜 할머니랑 사는 게 싫어? 너 할머니 보고 싶다고 그렇게 졸랐잖아."
"그거야 엄마랑 할머니랑 셋이서 같이 살고 싶다고 한 거지."
정류장에 도착한 정아는 공항버스 노선표를 들여다보았다. 
"엄마 그럼 사십 밤."
정아는 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은지가 정아의 옷자락을 세게 잡아당겼다. 정아는 은지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 눈에 익은 승용차 한 대가 비상등을 깜빡거리며 서 있었다. 내려진 창문 사이로 도톰한 손이 나와 까딱거렸다. 
"미친개 아저씨다!"은지가 소리쳤다. 
순간 정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에서 내린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마치 일행처럼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끌어다 트렁크에 넣었다. 정아는 순순히 은지를 뒷자리에 밀어 넣고 옆에 나란히 앉았다. 곧 부리부리한 눈이 룸미러에 나타났다.
"어디로 모실까. 방향이 부두는 아닌 것 같고, 혹시 공항?"
정아가 멀뚱거리는 사이 은지가 네, 하고 명랑하게 대답했다.  
"잘 됐네. 나도 지금 잠수 탄 년 잡으러 달려가는 길이거든."
생각해보면, 정아는 지금 그를 보고 가슴을 쓸어내릴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빌린 돈은 이미 다 갚았고 게다가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세 번이나 잠자리를 제공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와 마주치면 뭔가 잘못된 일을 도모하다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묘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근데 이 사실을 회장님이 아시나? 모양새로만 보면 내가 마치 토끼는 모녀를 공항으로 빼돌리는 상황이어서 말이야."
"참나, 정식 휴가에요. 그리 걱정 되시면 여기서 내려주셔도 돼요."
정아는 부러 다부진 톤으로 대꾸했다. 
"휴가라,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내 눈에는 캐리어를 끌고 가는 여자는 죄다 잠수를 타는 걸로 보여서 말이지." 
정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공항 3층 하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번에도 손수 짐을 내려주었다. 그러고는 지갑을 열어 지폐 몇 장을 은지의 손에 쥐어준 뒤 짐짓 무심한 표정으로 차에 올랐다. 정아는 멀어져가는 미친개의 차를 바라보았다. 은지가 손에 들고 있던 지폐를 정아에게 내밀었다. 그건 아저씨가 네게 준 거잖아. 주머니에 잘 넣어. 정아가 화가 치민 어투로 말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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