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성의 시사 칼럼

동풍신과 유관순 (6회)

by 편집부 posted Feb 1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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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성의 시사 칼럼 (6)

동풍신과 유관순


동풍신. 적어도 문재인 대통령에 의해서 이 이름이 거론되기 전에는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을 것이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앞에서 거행된 제99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유관순 열사와 동풍신 열사,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의사,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독립군의 어머니라 불리던 남자현 여사, 의열단의 박차정 열사, 독립자금 마련에 힘쓴 정정화 의사 등을 ‘건국의 어머니’라고 기렸다.


동풍신 초상.jpg

동풍신 열사


당시 필자에게는 매우 생소한 이름이었던 동풍신 (董豊信, 1904.3.15-1921). 곧바로 인터넷을 뒤졌다. 함경북도 명천 출신. 기록이 거의 없지만 남에는 유관순, 북에는 동풍신이라고 할 정도로 유관순에 필적할 만한 독립운동의 업적을 이룬 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동풍신의 아버지 동민수는 오랜 동안의 병환 중에 1919년 3월 14일 만세시위에서 시위 군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3월 15일 3㎞ 떨어진 함경도 길주 화대 장터로 달려가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다. 길주 헌병대에서 지원을 나온 제27연대 소속 기마 헌병 13명이 시위 군중을 향해 사격을 했고 시위대의 선두에 있던 동민수는 그 자리에서 총을 맞고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날 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동민수를 비롯하여 5명이 현장에서 숨졌고, 1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아버지가 총을 맞고 숨졌다는 소식에 동풍신은 현장으로 달려와 부친의 시신을 껴안고 대성통곡하였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목이 터져라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하였다. 총격에 놀라 골목 안으로 몸을 숨겼던 시위군중은 이 만세소리에 용기백배하여 다시 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는 기마헌병을 불러 들여 무차별 사격을 하도록 한 것이 면장 동필한의 지원 요청 때문이라며 면사무소와 면장의 집을 불태워버렸다. 동풍신은 이 날 시위에서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악랄한 고문 끝에 1921년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당시 17세의 어린 나이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유관순 (柳寬順. 1902.12.16-1920.9.28) 열사.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1 운동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1심에서 징역 5년, 2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투옥 중 모진 고문으로 18세 어린 나이에 순국하였다.


유관순 사진.jpg


유관순 열사




이제 몇 일 있으면 3.1 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된다. 100년전 한반도 전역에서 일어난 거대한 독립운동의 물결은 일제의 잔인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3개월간 지속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기간 동안 참가자가 106 만명,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구속된 사람이 4만 7천여명에 달한다.


민족대표 33인이 만든 기미독립선언문은 첫 구절에서 한국이 독립국임과 한국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있다. 기미독립선언문이 나온 후 26년 만인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한반도는 자주독립국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지만, 1948년 8월 15일 남쪽에서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되었고, 9월 9일 북쪽에서는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이 선포되어 한반도는 공식적으로 분단 상황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후 한반도는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비린내 나는 동족 상잔의 잔혹함을 겪었고, 전쟁 중에 1000만명의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분단상황은 더욱 고착되었고 근 70년 동안 상호 치열한 경쟁과 위협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극복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이런 점에서 100년 전 독립선언문은 아직도 미완의 선언이고 3.1 운동은 미완의 혁명으로 남아 있다.


비슷한 연배의 두 여성이 한 명은 아우내 장터에서 다른 한 명은 화대 장처에서 만세운동을 벌이다 순국하였다.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가 일제의 총검에 의해 현장에서 죽임을 당했듯이 동풍신 열사의 병든 아버지도 만세현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한 분은 만고의 열사로 회자되고 있는데 다른 한 분은 일반인에게 이름조차 생소하다. 이는 남북 분단에 의한 정치적 입김에 따른 편향성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지면서 남쪽에는 북한 출신 애국지사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혼란한 해방공간에서 독립운동가를 추스릴 시간도 없이 이념대결의 장으로 몰린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 중의 하나이다. 열사의 죽음 조차도 편애를 하게 만드는 분단 현실을 극복하고 남북한 통일을 이루는 것이 우리 후손의 역할이 아닐까?


100년 전, 이 땅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피 흘려 싸우다 순국하신 선열들의 명복을 빕니다.



하재성.jpg 

하재성

jaesungha@yahoo.com

유로저널 칼럼니스트

킹스톤 시의원 (Councillor of Kingston upon Th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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