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소설 (제115회)
바람의 기억
8. 낙화의 시간
연회가 끊긴 우림각의 풍경은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오후가 되면 표정을 잃은 아가씨들이 하나 둘 우림각으로 향했고, 해질녘이면 담장을 따라 서성거리던 사내들이 주위를 경계하며 잽싸게 쪽문으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입장한 사내들은 곧 아가씨와 2인 1조로 우림각을 나와 태연하게 사라지곤 했다.
시나브로 봄이 시들고 이내 여름이 왔다.
그 사이 정아에게는 좋은 일과 나쁜 소식이 겹쳤다.
영미가 마침내 수의를 벗고 우림각으로 돌아왔다. 홍변의 예상보다 훨씬 가벼운 처벌인 벌금형을 받고서 달포 만에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그건 강 회장의 강력한 로비에 더해서, 담당 판사와 연수원 동기였던 변호사의 활약이 컸다.
정아는 영미가 미결수로 있는 동안 세 번이나 면회를 다녀왔고, 양로원도 한 차례 방문해서 영미 대신 한나절 동안 딸 노릇도 했다. 또한 영미 동생의 영치금도 송금해주었다. 시간과 돈이 드는 일이었지만 친구를 도울 수 있어서 나름 흐뭇한 경험이었다. 좋은 일은 그것뿐이었다.
기남이 가끔 어머니 소식을 알려왔다. 그는 고맙게도 어머니를 택시에 모시고 자주 병원에 다녔는데, 최근에야 어머니의 정확한 병명을 알려왔다. 정밀 진단을 받은 결과 만성폐쇄성질환 판정을 받았다는 것. 나이가 들면 생기는 흔한 증상이니 너무 걱정하지마라는 기남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정아는 저번에 집에서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라 불안해졌다. -네 아버지가 드디어 소금가마니를 지고 내 허파 속으로 들어온 모양이다. 이젠 몇 걸음만 떼도 숨이 턱까지 차는 걸 보니.
찜찜한 소식 한 가지는 미친개가 가져왔다. 한동안 연락이 없어서 잊고 지냈는데 어느 날 문득 그가 문을 두드렸던 것이다. 그는 가져온 서류 뭉치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밀며 선언하듯 말했다. 오늘부로 우리는 다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라고. 정아가 소스라치자 뭐 그리 놀라느냐고, 강 회장이 우림각 채권 관리를 자기에게 맡겼다고 주장했다. 이게 무슨 황당한 소린가 싶었지만 그가 내민 종이를 보고는 아, 이런! 하고 탄식했다. 거기에는 정아의 이름 아래 원금과 지금까지의 상환 내역 그리고 잔금이 일목요연하게 적혀있었다. 정아는 정신을 바짝 차려 하나하나 체크했다. 절로 한숨이 났다. 그동안 그리도 억척스럽게 상환을 했건만 아직도 절반이나 남아있었다. 강 회장은 왜 그걸 미친개에게 맡긴 걸까. 우림각이 문을 닫게 되면 채권 관리가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하필이면 저 독한 미친개를 택하다니.
그가 이죽거렸다.
“회장님이 당신을 아주 총애하신 모양이지? 다른 아가씨들보다 이자가 터무니없이 싼 걸 보니. 그런 특혜를 준 이유가 뭘까? 뭔가 기브 앤 테이크가 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지. 하하하. 아, 나도 당분간 회장님과 동일한 이자율을 적용하니까 그렇게 인상 구길 필요 없소. 다만 연체 시에는 고율로 응징한다는 걸 잊지 마시오.”
미친개가 종이를 낚아채며 눈을 부라렸다.
좋지도 그렇다고 나쁜 일도 아닌 그저 그런 일도 있었다. 정아가 영미에 이어 이미테이션 매장의 대표자로 등재가 된 것이다. 이미테이션 매장이야 어차피 우림각과 공동운명체이니 곧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터라 정아는 별 고민 없이 수락했다. 하지만 막상 세무서에서 발행한 허가증에 자신의 이름이 찍혀 나오자 살짝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혹여 다시 단속반이 뜬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기 때문에.
*
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요 며칠은 바람이 거셌다. 정원의 나무와 풀들이 일제히 몸을 뒤챘고 바깥문들도 덩달아 덜컹거렸다.
소문이 흉흉했다. 오늘 아니면 내일에 우림각을 폐쇄한다는 말이 열흘 가까이 이어졌다. 강 회장이 법 시행 이전에 자진해서 문을 닫기로 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우림각은 규모만 큰 일개 요정이 아니라 지금껏 이 지역 밤 문화를 개척하고 이끌어온 거대한 세력이었던 탓에 업계의 모든 이목이 우림각을 향해 있었다.
이런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정아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일을 했다. 다른 아가씨들은 일주일에 한 번 나가기도 어려운데 거기에 비하면 운이 좋았다. 그건 이미테이션 매장의 대표자에게 내린 장 마담의 특혜 덕이었다. 정아는 우림각으로 출근하지 않고 장 마담이 정해준 커피숍에서 손님을 기다렸다가 바로 호텔로 가는 방식으로 일을 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오늘 3시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근하라는 안내 문자가 왔다.
라면으로 점심을 때운 정아는 좀 일찍 집을 나섰다. 중간에 영미를 만나 커피숍으로 갔다. 두 사람은 라떼를 홀짝거리며 출근 문자의 불길함에 대해 얘기했다.
“아까 마담 언니에게 전화했는데 아예 받지를 않더라. 이쯤 되면 오늘 무슨 일이 있을지 짐작이 되지?”
정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미는 라떼로 입을 축인 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면 미경이가 현명했어. 최고의 결정을 한 거야. 말 나온 김에 그년 목소리나 들어볼까?”
정아가 자세를 고치며 그러라고 했다. 영미는 핸드백에서 꺼낸 쪽지를 보며 휴대폰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가시나, 반갑다!”
스피커를 통해 저편에서 미경의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미가 재빨리 톤을 높였다.
“이년 살만한가 보네. 목소리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걸 보니. 지금 뭐하고 있나?”
“뭐하긴, 전화하고 있잖아. 헤헤, 방금 한탕 뛰고 숙소로 가는 중.”
정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다행히 옆 테이블 손님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영미는 개의치 않고 통화를 이어갔다.
“이 대낮에? 일감이 많은 모양이지? 손 달리면 불러라 여기 예비군들 널렸으니까.”
“얼른 와. 여기 마마가 한국에서 아다라시 왔다고 자자하게 소문을 낸 덕분에 요새 내 거시기 불난다.”
당황한 정아가 얼른 스피커폰을 일반통화로 돌린 다음 영미에게 건넸다. 정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통화는 계속되었다. 영미는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발을 동동 구르며 환호성을 질렀다.
휴대폰을 닫은 영미가 정아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야, 우리도 저쪽으로 가는 걸 고려해보자. 몸은 힘들겠지만 단타로 버는 건 저쪽이 훨씬 나은 것 같아. 저년 벌써 빳빳한 엔화를 겁나 많이 모았대.”
정아는 고개를 떨궜다. 미경이 이국에서 남몰래 흘렸을 눈물과 한숨이 절로 느껴졌다.
시간을 확인 한 정아는 커피숍을 나와 우림각을 향해 걸었다. 저만치 활짝 열린 대문이 보였다. 대문을 향해 아가씨들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영미가 턱으로 행렬을 가리키며 말했다.
“햐, 감개무량한 풍경이네. 호시절에는 매일 저랬어. 무슨 공단 출근길 같았지.”
“진짜 장관이다!”
“날이 날인 만치 오늘은 은퇴한 언니들까지 다 모이는 모양이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긴 줄 알겠어.”
“충분한 구경거리지. 너도 잘 봐 둬. 천하의 우림각이 문을 닫는 날이니까. 옛날 잘 나가던 시절이 생각난다. 이 시간 되면 이 거리에 아가씨들 살 냄새, 분 냄새 향수 냄새가 가득했거든.”
대문을 통과했다. 정아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미 복도는 물론 정원까지도 아가씨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