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연재소설 (제117회)
바람의 기억
9. 새장을 열다
정아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단속반이 눈에 불을 켜고 후미진 골목의 숙박업소까지 훑고 다녔는데 그걸 뚫고 일을 했다니.
“스무 번 넘게? 그게 정말이야?”
정아는 입을 하, 벌린 채 영미를 쳐다보았다.
“가시나가 속고만 살았나.”
영미가 거푸 눈을 흘겼다. 당당한 말투나 태도로 보아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정아도 법이 시행되고 본격적인 단속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제법 일감이 있었다. 장 마담이 다른 동료들 몰래 연결을 해준 덕분이었다. 하지만 시행일 이후로 일감이 뚝 끊겨 지금까지 꼬박 두 달 동안이나 쉬었던 것이다.
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업계 선두인 우림각이 폐업의 결단을 내리자, 같은 계열의 청림각과 개나리집도 차례로 문을 닫았다. 이어 다른 계열의 중소 업소들도 서둘러 셔터를 내리고 자물쇠를 채웠다. 불야성을 이루던 거리가 하룻밤 사이에 암흑천지가 된 것이다. 때문에 도무지 구조적으로 일감이 막혀있던 시기였다. 그런 한계상황에서 홀로 독야청청 손님을 받았다 영미. 그건 정말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독한 년! 동료들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을 때 대체 어떻게 일감을 구한 것일까. 다리를 놓아주던 여행사 쪽에서 아예 연락을 끊고 손을 놓고 있었는데.
짚이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갓 출감한 영미에게 지속적으로 손님을 연결해주는 이가 있었다면 그건 오직 하나, 우림각 예약 전화번호를 챙긴 사람일 터였다.
그 대표전화를 한국통신에 반납하지 않고 차지한 이는 바로 장 마담이었다. 반납하지 않은 이유가 그럴 듯했다. 혹시 성매매특별법이 시행된 줄을 모르고 개인적으로 입국한 일본 사내들이 연락을 해오면 누군가가 우림각의 폐업 이유와 그간의 사정에 대해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 그게 우림각의 마지막 도리라는 것이었다.
“넌 진짜 아프리카 정글이나 사하라 사막에 내놔도 끄떡없이 살 것 같아.”
정아가 감탄조로 말했다.
“그거 다 마담 언니 작품이야.”
“짐작은 했지. 너한테 빚을 크게 졌잖아. 언니 대신 수갑 찼고, 전과자 딱지까지 붙었으니.”
“내가 그런 걸 바라고 도와 준 건 아니잖아.”
“그러긴 하지. 사실 나도 너 출감하기 전까지는 혜택을 좀 봤어. 폐업 전 어수선하던 시기에 말이야. 이미테이션 매장 신임 대표에게 주는 특혜라고나 할까.”
“아, 맞다, 네가 내 후임으로 낙점되었다고 했지? 축하한다, 후배!”
영미의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며 깔깔거렸다.
승강기 쪽이 환해졌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열린 승강기에서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가 플라스틱 통을 들고 나와 저편 구석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나 집에서 빈둥거리지 않았어. 이력서 들고 뛰어다녔거든. 근데 가는 곳마다 하나같이 미안하다며 손을 내졌더라.”
“학원에도 가봤어? 수입은 적더라도 그게 네가 할 일이잖아. 그 치근덕거리던 원장이 쌍수를 들고 어서 오라고 했을 것 같은데.”
“물론 제일 먼저 학원으로 갔지. 근데...”
정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혹시 새 강좌를 열 계획이 있다면 맡겨달라고 사정해볼 계획이었다. 하지만 원장은 전에 그리도 은근하게 작업을 걸어오던 태도를 완전히 바꿔 매몰차게 내쳤다. 우리 학원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냐며, 돌아가서 일본 손님들이나 계속 받으라고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원장이 나 우림각에서 일한 거 다 알고 있더라.”
“지랄, 아니 학원에서 일본어만 잘 가르치면 됐지 과거는 왜 따진대?”
“이해해. 내가 원장이라도 그랬을 거야....”
잠시 침묵이 흘렀다. 플라스틱을 통을 든 유니폼이 다시 나타나 승강기 안으로 사라졌다.
“그나저나 장 마담이 나를 대타로 써줄까? 거절하면 어쩌지?”
정아가 영미를 지그시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걱정 마. 마담언니는 자기 몫만 챙기면 되니까 문제없어. 갑자기 생리가 시작됐다고 공갈치면 돼.”
영미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정아는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했다. 영미가 아무리 말을 잘해 준다고 해도 장 마담이 틀어버리면 그만이다.
“참, 장 마담에게 몇 프로나 주면 될까? 전에 여행사 수수료 정도면 돼?”
“아니야, 좀 더 높아. 이건 장 마담이 다이렉트로 따온 거니까 공정가에서 40%는 줘야 돼. 요즘 워낙 위험해서... 일종의 위험수당이라고 생각해.”
정아가 알았다고 말했다.
전에는 공정가 4만 엔을 받으면 여행사에서 1만 엔을 소개비로 가져가고, 요정에서 5천 엔 정도를 떼고, 그래서 나머지 2만5천 엔 정도가 아가씨 몫이었다. 그렇지만 오늘 일은 공정가에서 40%가 장 마담 몫이라고 하니 남는 돈은 2만4천 엔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비상시국에 24만 원이면 얼마나 알토란같은 돈인가.
정아는 그런 생각을 하며 엄마와 은지를 떠올렸다.
“너한테는 얼마 떼면 되니?”
“흥, 미친년! 그 동안 집안에서만 뱅뱅 돌더니 아주 제대로 돌았구나.”
“고마워서 그렇지.”
“내일 잘 다녀 와. 은지가 얼마나 좋아할까? 그나저나 엄마가 빨리 일어나셔야 될 텐데... 지금 병원에 계시니?”
“아니, 그냥 집에 계셔. 읍내 의원에는 입원실이 없거든. 가서 내가 큰 병원으로 모셔가야지.”
누워 계실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외손녀를 지켜보며 가슴속이 까맣게 타고 있을 가여운 엄마. 할머니 수발을 들고 있을 대견한 은지. 정아는 은지와 엄마를 떠올릴 때마다 마치 생선 가시가 걸린 것처럼 오목가슴이 아팠다.
어제 낮에, 은지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할머니가 많이 아프다고, 그래서 슬프다고. 그렇지만 조금 기쁜 일도 있다고, 오늘도 국어를 백점 맞았노라고. 엄마 많이 보고 싶다고. 겨울 방학하면 할머니랑 엄마 보러 가도 되냐고. 정아가 대답했다. 할머니 따뜻한 밥 드리고 약 챙겨드리라고. 다른 과목도 맨날 백점 맞아야 한다고. 엄마가 내일이나 모레쯤 우리 착한 딸을 보러 가겠노라고. 신이 난 은지가 수화기를 할머니에게 넘겼다. 엄마의 목소리는 전보다 더 힘이 빠져있었다. 몸이 편찮아서인지 전에는 입에 담지 않았던 말을 했다. 이제 그만 돌아오라고. 네가 보고 싶어서 병이 난 거라고. 이젠 늙은 어미와 저 어린 것이랑 같이 살아야할 게 아니냐고.
전화를 끊고, 가방에서 통장을 꺼내보다가,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한숨을 쉬다가, 딸아이에게 할머니 따뜻한 밥 차려드리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엉엉 울다가, 다시 힘을 차려 영미에게 전화를 걸었다. 처지가 빤한 친구에게 돈 얘기를 한다는 건 슬프고 염치없는 일이었다.
시침이 7시를 훌쩍 넘어갔다. 그런데도 주차장에는 개미새끼 하나 얼씬거리지 않았다. 장 마담은 지금 어기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뭔가 일이 꼬인 게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연락이 없을 수가 없다. 다시 또 밀려드는 불안의 그림자.
오늘 일이 틀어지면 내일 집에 가기가 어려워진다. 다들 비슷한 형편들이라 손 벌릴 곳이 없다. 돈 생각을 하니 부아가 치밀었다. 하도 죽는 소리를 해서 이자 내려고 가지고 있던 돈을 빌려주었는데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진 귀순이년. 귀순은 지금 내가 고향에 갈 여비가 없어 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상상이나 할까.
“야, 기분 풀어라. 내가 대따 재미있는 얘기해 줄게.”
영미의 얼굴에 이내 장난기가 가득했다.
“글쎄, 사흘 전에 오사카에서 왔다는 놈하고 저기 바닷가 호텔에서 하는데 말이야, 내 겨드랑이에 털 나고 그런 싸이코는 첨 봤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