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혜의 예술칼럼(231)
미국의 아방가르드
3. 2차대전 이후의 아방가르드 논의
193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아방가르드 열풍은 1920년대까지의 유럽에서 일어난 것과는 전혀 맥락이 달랐다. 대공황이라는 큰 위기를 배경으로 1930년대 미국에서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비판성에 대한 인식이 고양되어 있었고, 이것은 근본적인 변화를 지향하는 정치 이념들과 예술의 결부를 매우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게 만들었다.
당시 자신이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마르크스주의 관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대공황기의 뉴욕에서 좌익 성향의 급진적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혁명적 이데올로기가 제시하는 목적에 이바지하며 노동계급에 봉사하는 정치적인 예술에 스스로 헌신하고자 나섰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의 가장 강력한 혁명 이데올로기였던 스탈린주의가 1930년대 중엽 순수성과 도덕성을 잃어간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스탈린주의의 변질은 또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Socialist Realism)로 알려
진, 즉, 예술을 전체주의로 변질된 정치 이념의 선전 수단으로 도구화 하려는 의도를 띄고 있었다.
불가리아 소피아의 사회주의
예술
이에 따라 뉴욕의 급진적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스탈린주의로부터 이탈함과 동시에 혁명적 이데올로기로서의 순수성을 지닌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추구하면서, 예술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전과는 다른 사고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930년대말 뉴욕에서 일어난 아방가르드 움직임은 바로 이러한 맥락 위에서 일어났다. 그린버그는 이것이 ‘트로츠키주의’로 시작된 ‘반스탈린주의’ 시대의 산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예술에 관한 한, 이 아방가르드의 움직임의 핵심은 ‘예술의 독립성’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의 주장이었다
레프 트로츠키
트로츠키주의의 사고 틀 내에서 예술의 독립성은 예술의 혁명적 잠재력과 전혀 상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트로츠키의 관점은 스탈린의 관료주의 체제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예술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예술이 예술 고유의 법칙과 원리 이외에는 모든 권위로부터 독립해 있어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이 주장은 곧 스탈린주의가 강조하는 예술의 기능에 대한 관념과 예술의 독립성을 인정하지 않는 관료적 억압에 대한 맹렬한 공격이었다.
트로츠키는 예술은 근본적으로 신체에서 신경이 하는 것과 같은 기능을 하면서 완전한 몰두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진정한 예술이 소련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는데, 왜냐하면 10월 혁명 이후 대대적으로 형성된 관료제도가 혁명이 산출한 예술적 추진력을 퇴보시키고, 거짓, 기만, 아첨에 기반을 둔 관제예술로 변질시켰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당시 미국 정치적 당파들과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들에 대하여 독립성을 견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미국 예술가들에게는 이러한 트로츠키의 주장은 한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트로츠키주의를 선택한 미국 아방가르드는 유럽의 역사적 아방가르드에게서 보였던 것처럼 예술의 독립성 내지 자율성이라는 환상을 분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자유로운 혁명 예술을 위해 확실한 독립성을 확보 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트로츠키가 보장한 이 예술의 독립성은 미국의 미술가들에게 모든 정치적 당파들로부터 독립해서 추상을 비판적 언어로 사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2차대전 이전 유럽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제기된 이러한 미국의 아방가르드 움직임 속에서 그린버그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930년대 후반 뉴욕의 지식인 사회에서 파티잔 리뷰 지를 중심으로 진행되어온 아방가르드에 대한 논의는 이 잡지의 1939년 가을호와 1940년 여름호에 각각 발표된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아방가르드와 키치’ 그리고 ‘더 새로운 라오콘을 향하여’에 의해 계승되었다.
Partisan Review 5 (1939)
그린버그는 1938년 말경 이 잡지와 관계를 맺게 되었고, 1941년에는 이 잡지의 편집자가 되었으며, 바로 그 해부터 네이션 지에도 미술 비평을 싣기 시작했다.
Partisan Review
이런 그의 직위를 통해 1940년대 내내 그는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매우 짧은 시간 안에 그린버그는 뉴욕항 세관에 근무하면서 남는 시간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고, 때로는 한스 호프만의 강의에 참석하던 상대적인 무명시절로부터 벗어나, 급진적 지식인 운동과 문화적 인텔리전트 내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Clement Greenberg
그리고 그의 아방가르드문화론은 전반적인 문화적 퇴행 아래 뉴욕의 지식인들이 전개해온 아방가르드 문화에 대한 논의를 훌륭하게 정식화했다.
사실 아방가르드 문화는 서구 부르주아 사회에서 문화의 정체에 대해 저항하거나 극복하려는 수단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19세기 중엽 경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사회·경제적 조건들이 얽혀 있던 그물망 속에서 그것에 대항하여 생산된 문화의 새로운 형식이었다. 즉, 이런 아방가르드는 문화를 계속해서 움직이도록 하는 힘이자, 문화를 진보시키고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새로운 힘이었다.
그린버그는 이러한 아방가르드의 탄생이 두 단계에 걸친 분리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분석했다. 첫 단계는 19세기의50년대와 60년대에 진보적인 지적 양심의 한 부분을 이루게 된 탁월한 역사 의식, 즉 역사 비평의 출현을 기반으로 한 부르주아 사회로부터의 분리였다.
아방가르드는 혁명 사상의 도움을 받아 부르주아 사회로부터 이데올로기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분리됨으로써 형성되었지만, 일단 그러한 분리가 일어나자 아방가르드는 애초에 그것이 스스로의 다름과 거리를 의식할 수 있게 해주었던 혁명적인 정치적 관념들을 거부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차별화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단계, 즉 정치로부터의 분리다.
그린버그의 혁명은 물론 사회주의자체에 대한 이러한 비관주의는 그의 글 ‘아방가르드와 키치’의 끝부분의 한 유명한 문장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문화를 위해 사회주의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1939년부터 1941년 당시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환멸이 극에 달하고 동시에 대대적인 반공 정책(red scare)이 시행되던 때였다. 공산당의 도덕적 실패와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무능을 목격한 후, 필요했던 것은 오로지 현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비혁명적 해결책이었다.
따라서 정치와의 분리는 단순히 비정치적 입장 혹은 정치적 무관심을 함축하는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거리, 즉 아방가르드가 비참여로써 완수했던 독특한 기능을 함축하는 것이었다.
Hans Hofmann, The Third Hand,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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