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의 프랑스 이야기
뮤즈들과 찾아가는 예술 이야기, 역사이야기 – 쟌느 다르크
프랑스 국가의 뮤즈 쟌느 다르크, 대혁명의 뮤즈 마리안느
프랑스 국가의 뮤즈 쟌느 다르크는 나라가 어렵든지 주변 국가가 도발할 때 국민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구국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프랑스 혁명 이후 수많은 뮤즈들이 등장한다.
프랑스 역사가 보여주는 국가의 뮤즈는 쟌느 다르크다. 쟌느 다르크는 모든 프랑스 인들의 가슴에 애국심과 국수주의를 심어 주기 위하여 태어났다. 역사에서 쟌느 다르크는 영국과 부르고뉴 공국사이에서 프랑스가 소멸하는 시기에 나타나 프랑스를 되찾고 자신을 불태운 애국의 화신이다.
상처 입은 마리안느가 공화국의 상징으로 분노하고 있다. 2019년 노란조끼 시위대들은 공화국의 상징을 부수며
신분 상승의 승강기가 고장난 공화국을 상처입혔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을 통하여 탄생한 신생 공화국은 혁명의 뮤즈로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상징되는 "마리안느"를 뮤즈로 등장시켰다.
혁명이 낳은 소시민 마리안느라는 여인은 공화국의 상징이 되어 프랑스 대통령 궁이나 모든 지방 자치 단체 장의 사무실에 그 흉상이 조각 작품으로 모셔져 있다.
쉐르 지방 마리안느 공모전에 출품된 조각상. 공화국은 시민을 먹여 살리는 가슴이 중요하다.
쉐르 지방 마리안느 공모전에 출품된 조각상. 공화국은 시민을 먹여 살리는 가슴이 중요하다.
여성 소시민이 혁명의 상징으로 공화국의 표상으로 공표되었지만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소시민 자격을 갖추는데 20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쟌느 다르크
엥그르의 작품 성년 잔다르크. 갑옷과 창으로 무장하고 영국군대와 맞서기 위한 출정 준비
프랑스 역사의 표지 모델로 등장하는 쟌느 다르크 Jeanne d'Arc는 15세기 백년 전쟁 당시 침략자영국과의 전쟁에서 프랑스 해방을 이끈 구국의 영웅이다.
신의 부름에 응하여 샤를르 7세가 프랑스 왕이 되도록 돕고, 쟌느는 자기 확신에 대한 댓가로 1431년 루앙의 시장터에서 자신의 몸을 산채로 제물로 바쳐 태워졌다.
쟌느는 1412년로렌 지방 동레미Domrémy에서 태어났다. 아주 경건한 소녀로 매주 교회를 출석하며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농가의 여인이었다.
당시 영국의 왕 에드워드 3세는 트르와 조약에 따라 프랑스 왕국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영국왕 에드워드3세1312-1377, 왕위에 50년 집권하면서 백년전쟁의 승리를 이끌었고
전쟁사에 큰 업적을 이룬 크레씨 전투(1346년)로 큰 흔적을 남겼다.
백년 전쟁의 시작 : 여자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
프랑스 귀족들은 결사 반대하며 프랑스 왕관은 돌아 가신 왕 샤를르6세의 아들 인 샤를르에게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왕국은 영국인들과 부르고뉴인들 그리고 세자에게 충성하는 자들로 나뉘어 있었다.
세자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왕국의 세력들의 소멸할 시점에 쟌느 다르크가 등장하였다.
12살인가 13살의 소녀는 아버지 집의 정원에서 음성을 들었다고 선언했다.
로렌 지방 동레미에서 신의 음성을 듣는 처녀 쟌느 다르크
처음에는 너무 무서웠다고 전한다. 하늘의 음성은 세자를 왕좌로 올려 주고 영국의 지배로부터 프랑스를 해방시키라는
하늘의 음성에 응하며 쟌느는 세자 샤를르의 경호대장 로베르 드 보드리꾸르 Robert de Baudricourt 를 만나러 보꿀뢰르 Vaucouleurs 로 갔다. 세자를 알현하게 해 달라는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로렌 지방에서 처녀가 나타나 잃어 버린 왕국을 구할 것이라는 예언을 알고 있었다.
하늘의 음성을 들으며 두려움에 떠는 쟌느 다르크-쥘 으젠 르네프뵈-빵떼옹-
쟌느는 미래 왕이 될 샤를르7세 Charles VII(140301461)를 만나러 쉬농 Chinon 으로 갔다. 평범한 복장을 한 왕을 군중의 무리에서 찾아 내었고 자신이 들은 하늘의 음성을 왕에게 전했다.
의심 많은 왕은 쁘와띠에 종교 당국에 쟌느를 심문하게 하고 처녀성을 검사시켰다.
샤를르 7세 프랑스 국왕, 쟌느 다르크의 도움으로 대관식을 치루며
왕권의 합법성을 찾았고 1453년 가스티용까스티 백년 전쟁을
마무리 한 승리의 왕 (루브르 소장 왕의 초상화)
쟌느는 그들에게 네 가지 예언을 한다. 영국인들이 오를레앙의 전투에서 물러갈 것이며 왕은 렝스에서 대관식을 치룰거다.
빠리는 왕국의 영지로 환수될 것이고 영국에 포로로 잡힌 오를레앙 공은 곧 돌아 올 것이다.
숫처녀라는 별명을 지니고 쟌느는 갑옷을 입고 검을 들고 오를레앙을 향하여 출발한다. 오를레앙의 처녀 쟌느는 영국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기가 곧 도착할 것이며 오를레앙을 비우라고 요구한다. 영국인들은 거부하였고 쟌느를 마녀라고 불렀다.
구국의 뮤즈 쟌느 다르크
프랑스는 수 많은 전투에 패배하였지만 전쟁에 진 경우는 없다.
믿음의 소녀 쟌느는 프랑스 부대원들을 격려하며 전투에 임하여 1429년 5월7일밤 영국 군대와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5월8일 아침 이 소식은 프랑스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지나가는 모든 도시들을 굴복시키면서 렝스로 길을 이어갔다. 1429년7월17일 렝스 대성당에서 샤를르 7세 라는 이름으로 쟌느의 참석가운데 대관식을 치루었다.
렝스 대성당의 샤를르 7세 대관식 – 쥘 으젠 르네프뵈의 작품
절반의 임무를 마친 쟌느는 이제 빠리를 해방시키기 위한 행군을 이어간다. 1430년 5월23일 꽁삐에뉴Compiègne 에서 쟌느는 부르고뉴 군대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돈이 되던 시절 쟌느 다르크는 부르고뉴 당국이 영국에 일만 파운드에 팔아 넘겼다.
프랑스 왕과 귀족들은 쟌느를 구하기 위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다.
쟌느는 루앙으로 끌려갔고 재판에 회부되어 이단이라는 죄목으로 화형 언도를 받았다.
1431년 루앙의 옛시장터에서 쟌느
다르크의 화형식-화가 쥘 으젠 르네프뵈
40명으로 구성단 재판의 장은 영국 왕실 편에 선 보베의 주교 삐에르 꼬쏭 Pierre Cauchon 이 맡았다. 화형의 집행은 옛 시장터 광장에서 1431년5월30일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왕 샤를르 7세는 자신을 왕좌에 앉혀준 쟌느를 구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쟌느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프랑스는 백년 전쟁을 무사히 마치며 대륙에서 영국인들을 완전히 몰아냈다.
백년 전쟁 그 이후
쟌느가 죽은지 25년 후 쟌느 부모의 요청을 받아들여 당대 교황 칼리스트3세는 쟌느를 속죄시켜주었고 왕 샤를르 7세는 쟌느의 첫 번째 재판을 번복시키며 복원시켜주었다.
프랑스 왕국을 구한 프랑스의 뮤즈 쟌느는 19세기 유럽 열강이 전쟁의 수렁에 빠져들었을 때 구국의 뮤즈로 다시 환생한다.
프랑스를 구한 쟌느를 위하여 1920년 쟌느 사후 오백면 만에 로마 교황청은 베네딕트 15세 교황시절 쟌느 다르크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 주었다.
쟌느 다르크가 성녀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면 프랑스는 마녀의 도움으로 되찾은 나라다. 프랑스 역사의 정통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교회의 도움을 절실하였고 쟌느의 죽음 오백년 후 쟌느는 성녀가 되어 프랑스 사람들을 안도케 하였다.
여자가 남자의 복장을 했다는 이유로, 신의 대리자가 될 수 없는 여자가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이유로 마녀로 몰려 화형당한 쟌느 다르크는 여성의 지위를 상상할 수 없이 높은 위치로 올려주었다. 애국의 뮤즈로 나라 정체성의 표상으로 극우 전선의 깃발 부대는 쟌느를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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